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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상기님의 둥둥 북소리 108
작성자김명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9-03-16 조회수471 추천수2 반대(0) 신고

오늘의 묵상입니다.[사순 제3주간 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24ㄴ-30
[나자렛에 도착하신 수예님께서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그동안 사순절 피정 등 개인 사정으로 잠시 중단했던 복음 묵상을 다시 재개합니다. 오늘 복음은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장면으로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복음입니다.

루카복음서는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파한 바오로사도를 수행한 의사 루카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루카 기자는 이방지역에 거주하는 유대민중(디아스포라)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복음서를 기록하였으므로 이방인에 대한 배려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마르코와 마태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은 목수인 요셉의 아들이기 때문에 신분이 미천하여 고향에서 푸대접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루카 기자의 관점은 예수님은 유대 땅에 거주하는 유대 민중보다는 오히려 이방지역에 거주하는 유대민중과 이방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의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점이 다른 공관복음서와 다른 점입니다.

묵상에 앞서 참고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의 이 말씀은 신기하게도 금강경 11分에서 이 말씀과 동일한 의미인 '我今實言告汝'로 딱 한번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이 어법은 우리 동양권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어법이지만 복음서에서는 자주 사용하는 어법입니다. 이를 통해서 새롭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지중해의 에게해 문명 쪽으로 진출한 아리안 족과 인도 서북부 갠지스강 문명 쪽으로 진출한 아리안 족의 동일성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에게해 문명과 갠지스강 문명의 역사적 교류는 BC 4세기에 알렉산더 대왕이 갠지스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두 문명이 교류하였고 이 당시에 간드라 미술이 탄생된 것처럼 이때에 두 문명의 정신사적 교류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 조각의 섬세함이 경주 석굴암 불상에서 찬란히 꽃을 피운 것은 인류 문명의 교류는 생각보다는 폭넓게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것입니다.  

'진실로'(實言)의 의미는 '잘 명심하여라.'는 권고의 뜻이 있습니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뜻이므로 오늘은 이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고향은 단순히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적게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조직체를, 크게는 우리 사회 전반을 뜻하고 있습니다. 어느 조직체나 완전무결한 무오류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조직의 오류를 지적하고 시정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선각자인 예언자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선각자들은 조직의 기득권층으로 부터는 결코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특히 교리를 중시하는 종교라는 특수한 조직에서는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듯 예수님의 앞날이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모든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고향 라자렛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 것을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언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차별없이 똑같이 계시를 하고 있으며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계시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변함없이 해가 뜨고 지고, 밤과 낮이 교차하고,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지고 하는 등 모든 자연현상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계시의 은총인 것입니다. 이런 계시의 은총을 우리 삶에 적용하여 이를 알려주는 사람이 예언자며 선각자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불변의 우주질서인 하느님의 계시를 매일 듣고 보고 있으므로 모두가 예언자임에도 예언자가 될 수 없는 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처럼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예언자들이 많아야 가능하지만 모두가 환영받기를 좋아하고 십자가를 지고 수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사회에서 호의호식하며 일신의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분입니다. 그러나 참 하느님의 뜻을 아셨기에 하느님의 뜻을 민중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수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사악한 것을 파하면 바른 것이 들어난다는 破邪顯正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걷는 길은 모두 고난의 길입니다.

한 알의 씨알이 되고,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그 수난의 길을 저는 걸을 수는 없지만 각 분야에서 그 길을 마다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므로 그 분들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것을 제 신앙의 한 축으로 삼을 것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지체이고 또한 우리 사회의 지체입니다. 지체는 뿌리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우리는 우리 사회를 떠나서는 그 어느 누구도 한시도 살 수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는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이고 우리가 사는 사회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따로 있고 내가 사는 사회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좁은 울타리를 제 마음 속에서 헐어버리는 그런 신앙인이 될 것을 다짐하며 오늘 묵상을 마칩니다.

대자대비하신 아빠 하느님!
예수님은 파사현정을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자처하셨습니다.
일신의 영화보다는 오로지 한 알의 씨앗만을 생각하며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각 분야에서 고난의 예수님의 길을 걷는 그 모든 분들을 성원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또한, 제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바로 교회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언제나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옵기를
성자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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