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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가당착과 아전인수-판관기78
작성자이광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23 조회수408 추천수5 반대(0) 신고

자가당착과 아전인수-판관기78

 <생명의 말씀>
 그들은 미가의 집 근처에서 젊은 레위인의 목소리를 듣고 그가 있는 데로 가서 물었다. "누구를 만나서 이리로 오게 되었소? 여기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거요? 그리고 여기는 어쩐 일이오?" 그는 자기가 미가에게 이러저러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제로 고용되어 있는 몸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저희의 사명이 성취될 것인지 하느님께 물어 보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사제는 안심하고 가라고 하면서 그들이 가는 길이 환히 트이도록 야훼께 보살펴 주실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이 말을 듣고 다섯 사람은 길을 떠나 라이스에 이르러 보니, 그 곳 사람들은 시돈 사람들처럼 태평스럽게 살고 있었다. 땅에서는 안 나는 것이 없어, 아쉬운 것 없이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살고 있었다. 게다가 시돈 사람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아람 사람들과도 아무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소라와 에스다올로 돌아 와 경과를 묻는 친척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치러 올라 갑시다. 우리는 정말 좋은 땅을 보고 왔습니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 가서들 보십시오. 땅은 넓은데 사람들은 방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녕 우리에게 그 땅을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있습니다. 없는 것이 없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 육백 명이 무장하고 소라와 에스다올을 떠났다. 그들은 유다 지방에 있는 키럇여아림에 올라 가 진을 쳤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 곳을 오늘날도 단의 진지라고 부른다. 그곳은 키럇여아림 서쪽에 있다. (판관기 18:3-12)

 <말씀의 길잡이와 실천>

 더 나은 경제적 조건 더 편하고 윤택하게 살고 싶다는 이유로 본래 하느님이 주신 소명과 사명의 땅을 버린 사람들의 기막힌 만남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레위인 사제도 경제적인 이유로 더 좋은 삶의 조건을 위해 하느님이 주신 곳을 버리고 미가의 집에 와 있었고, 단 지파 사람들도 하느님이 주신 자기 땅을 버리고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니던 중 미가의 집에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젊은 레위인의 목소리를 듣고 단 지파 사람들이 그가 사제인 줄 알아본 걸 보면 아마도 젊은 레위인 사제는 하느님께 제사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미가의 집에 사제가 있다는 걸 알고 단 지파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젊은 레위인 사제에게 자기들의 사명-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서 정복하는 것-이 성취될 것인지 하느님께 물어봐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신 소명의 땅을 헌신짝 버리듯 여기고 떠날 마음을 먹었으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일언반구 뜻을 여쭙지 않았으면서, 오직 관심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자기들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이루어질 것인지에만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들에서는 자가당착(自家撞着)과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젊은 레위인이 사제이긴 하지만 '야훼'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신상을 숭배하고 있었으니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 리가 없습니다. 젊은 레위인 사제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면 하느님이 주신 자기 땅을 버리고 떠날 궁리만 하고 있는 단 지파 사람들을 꾸짖어서 본래의 땅으로 돌아가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젊은 레위인 사제 자기 자신도 더 나은 경제적 조건을 위해서 하느님이 주신 땅 베들레헴을 떠나 이상한 계약을 맺고 한 집안의 사제로 들어 앉아 버렸으니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다른 사람을 꾸짖을 만한 처지가 되질 못합니다. 

 미가의 집에서 만난 이 둘은 각자의 빗나간 모습을 상대방에게서 확인하면서 깊은 회개를 하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게 바로 미가의 집에서 우연히 이 둘을 만나게 하신 하느님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격려를 합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이상한 계약을 맺고 사제 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 레위인을 사제로 인정하고 예언을 해 달라고 하고, 젊은 레위인 사제는 그 사명이 평안히 성취될 것이라고 제 멋대로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자니 두렵고 답답하고 불편한데, 서로에게 편한 쪽을 택하고 나서 서로 인정해주고 좋은 말을 해 주니 전혀 불편한 것 없이 서로 편안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뜻과 전혀 관계없는 계획을 사람들끼리 하느님의 뜻인냥 서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고 서로 격려해 주는 사랑을 하고 있으니 마치 자기들이 하느님을 충실히 아름답게 따르는 사람들인냥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축되어 있을 때 인간적인 격려가 물론 힘이 되긴 합니다. 그러나 그 격려가 하느님과 나 사이의 망가진 관계에서 오는 아픔을 마취시키는 것이라면 상당히 곤란합니다.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 근원적인 화해를 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과의 근원적인 관계는 틀어져 있으면서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서 살아가는 가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삶이 불편해지고 내가 추구하는 뭔가가 틀어질 것 같아서 계속 미루어 두는 것들이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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