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두 종류의 불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23 조회수541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49-51)

엘리어트(T. S. Eliot)는 그의 시 <네 개의 사중주>에서 두 종류의 불을 노래하고 있다.
유일한 희망, 아니면 절망은
불 또는 불의 선택에 달려 있다-
불로써, 불에서 구원을 받는다.
 
엘리어트는 이 시에서, 하느님의 불꽃에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본인 스스로 만드는 불꽃에 의존할 것인가 하는,
모든 사람들이 괴로워하면서 선택하는 불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 모두 불안하게, 에로틱하게, 긴장감에 가득 차서, 끊임없이 쉬지 못하지만,
강렬한 열기를 갖고 태어났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이루기 힘든 성공, 평안, 사랑, 교향곡을 위하여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다.
이루지 못하는 끊임 없는 아쉬움 속에서,
우리 몸 속의 모든 세포와 우리 마음의 모든 곳에 있는 불을 갖고
우리가 여태까지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나 일을 위하여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들은 쉬지 못하게 되고 충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결코 만족할 수 없고 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불태워 이를 경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 부족과 같은 쉬지 못함과 충동적인 이유 때문에 행동한다.
그리하여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며
왜 사는지 하는 인생의 참뜻도 알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보다 큰 것, 보다 좋은 일, 보다 좋은 장소를 찾아 스스로를 불태우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인생을 시시하게 그리고 하찮게, 허무하게 생각하며 가정에만 충실하고 살려고 한다.
이 불은 우리들을 쉬지 못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들을 잘 못 살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불은 우리 마음의 아주 깊은 곳에 있다.
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짐승과 사람을 항상 합리성에 기준을 두고 판별하였다.
나는 동물은 초원에서 풀을 만족스럽게 뜯어 먹고 살고
인간은 술집에서 불만족스럽게 담배를 피우면서 사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마음의 깊이에서도 차이가 난다.
동물은 마음의 깊지 않은 곳에서 판단하여 행동 하지만
사람은 깊은 곳에서 판단하여 행동하며 산다.
 
마음 깊숙한 곳에 끝없는 아쉬움이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불태우며 살게 된다.
자신을 갉아먹는 소모전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불은 옳은 경험 즉 옳은 연인을 만난다고 해서,
옳은 직업을 갖는다고 해서, 좋은 도시에 산다고 해서, 옳은 친구를 갖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인정을 받고 살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은 평온을 갖느냐 쉬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쉬지 못함, 즉 두 종류의 불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중 한 불을 태우며 죽어야 하지만 질적으로 전혀 다른 불이다.
즉 하느님의 불꽃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우리 자신의 불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들을 쉬지 못하게 하는 불에 대한 해결책은 보다 고차원의 불,
고차원의 에로스, 고차원의 쉬지 못함 즉 하느님의 에로스로 불태우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산불을 끌 때 맞불을 놓아 불을 끄듯 하느님의 불로 인간의 불을 꺼야 한다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가 마지막 정점, 마지막 교향곡 즉 하느님의 왕국을 위하여
자신을 불태우려면 무언가를 더욱더 많이 아쉬워하며, 더 많은 아픔을 맛보아야 하며,
심리적인 온도를 더욱 더 높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해결되지 않는 성적 흥분이나 그 밖의 다른 흥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우리는 두 불 중 하나를 골라서 더 깊이 더 폭넓게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외로움과 같은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성령의 불로 구원 받아야 하며, 우리들의 에로스는 하느님의 에로스로 대체되어야 하며,
아픔은 하느님의 아픔으로 구원 받아야 하며, 좌절은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끊임 없이 생기는 충동은 묵상으로 구원 받아야 한다.
 
위대한 영성 작가들은 항상 말하였다.
그리스도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려고 애를 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느꼈던 것처럼 느끼려고 애써야 하며,
그리스도의 동기 즉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이 정점에 도달하도록 기원해야 한다.
 
이러한 느낌이 불이고, 쉬지 못함이고, 아픔이고, 에로티시즘이다.
그러나 이 불은 결코 충동적인 탐욕으로 이끌지 않고,
생활의 활력을 얻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쉬지 못함은 오히려 자선, 기쁨, 평화, 인내, 선(善), 오랜 고통,
꾸준함과 온화함과 금욕의 성령 강림으로 이끌어 하느님의 불로,
하느님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불을 끌 수 있게 한다.
 
그러면 누가 이 고통을 만들었는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맞이 하면서 불에 대하여 노래하였다.
 
태양의 찬가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 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롤하이저 신부님의 묵상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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