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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 윤경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1 조회수471 추천수8 반대(0) 신고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 윤경재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7-50)

 

 이 대목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장면입니다. 특히 어머니 마리아와 관련해서 예수께서 어머니를 무시하고 소홀이 대접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 갖가지 억측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 되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이 대목 바로 앞에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여 붙잡으러 왔다는 구절이 적혀있어 더욱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친척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나를 붙잡으러 왔다는 정황을 이야기 하는듯해서 더욱 논란이 생겼습니다. 

일부에서는 비록 어머니 마리아가 내 몸을 낳으셨지만, 자신의 사명을 통찰하지 못하고 훼방만 놓는다면 공동체의 형제애보다 못하다고 지적하셨다는 해석을 내립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착각 중에서 하나는 부모형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내가 왜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왜 이런 자식을 탄생하게 하였는지 그 깊은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필 이럴 때 이런 정황에서 태어나고 또 자식을 탄생하게 하였는지 그 연유를 속 시원히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정답은 ‘그저 모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모형제를 내 몸처럼 안다고 지레짐작합니다. 특히 자신의 자식을 자신의 분신으로 착각합니다. 온갖 정성과 기대를 자신의 분신에게 투자하고 희망을 겁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머지않아 그 기대를 간섭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건널 수 없는 도랑이 생겨납니다. 그 까닭은 부모형제 사이는 하나의 신비이지 후천적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안다고 오해하고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인간은 신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알아내려고 노력합니다. 모르는 채 내버려두면 공연히 불안해집니다. 결국에는 신비마저도 안다고 우깁니다. 

사람들은 신비를 비유라는 방법을 통해 해석하려고 합니다. 비유는 유추입니다.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다 하고 일부분을 감추어 둔 채 안다고 미뤄 두는 행위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마르 4,11)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비와 비유 사이를 깨달으라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비는 인간의 노력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셔야만 확연이 볼 수 있는 그런 경지입니다. 그럼에도 이미 보여주신 그 어떤 진리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자체가 신비를 열어 보이신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신비와 비유를 혼동합니다. 신비마저도 비유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부모형제 사이는 신비이지 비유가 아닙니다. 비유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짐작할 뿐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그럼 그저 비유로 알아들으면 됩니다. 공연히 신비의 사건에 비유를 가져다 대어 혼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비유로 세상 사람들을 이끄셨습니다. 무작정 신비로 넘어가기엔 걸림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비유를 들은 사람은 비유의 단계에서 신비의 단계로 넘어가야합니다. 그때 우리의 이해와 깨달음이 요청됩니다.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비를 신비로 수용할 겸손한 자세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비유의 단계에서 신비의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충정을 복음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4-15) 

예수님의 근심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듯이 유대인 특유의 표현법입니다.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옳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신비입니다. 하필 누구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왔는지는 더욱 더 신비입니다. 이 두 가지는 그저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유보해 두어야 합니다. 공연히 아는 척을 해서는 곤란합니다. 

이와 달리 배우자를 선택하거나 누구와 의형제를 맺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이 이루어낸 것이기에 신비가 아니라 비유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교육으로 알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형제가 된다는 것은 비유로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의지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비와 비유를 엄격하게 구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신비의 단계까지 돌파하라고 요청하시고 계십니다. 열두 제자는 바깥사람들과 달리 신비를 알아보고 들은 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은 요청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바깥사람 수준에 머물며 방관자가 될 것인지 선택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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