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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복음 맛 들이기 - 연중 제 27 주일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04 조회수547 추천수8 반대(0) 신고

 

 

 

                             연중 제 27 주일 - 봉헌이 아까울 때

 

                                                                          < 마태오 21, 33-43 >

 

 

 

요즘 경제도 경제지만 그 우울함과 맞물려 더 큰 충격을 준 사건이 바로 최진실씨의 자살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치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어떤 사람이 갑자기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처럼 멍해집니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수제비만 먹으며 자랐고 엄마가 포장마차 끄는 것이 창피해 숨어 다녔으며 유명해져서도 이혼을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중년 여배우로서 자신의 자리를 잘 지켜왔습니다.그러나 이번에만은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故 안재환씨에게 사채를 빌려주었다는 악성 루머에 휘말리자 ‘국민들에게 섭섭하다.’는 마지막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예인이란 본래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런 악성루머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힘까지 빼앗나 봅니다.

세치 혀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라면 이런 센티멘털리즘에만 빠져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자살을 살인죄로 여깁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라 나의 생명을 죽이는 것도 살인입니다. 어차피 우리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으니 하느님의 것입니다.

  최진실씨의 자살 소식을 들으니 또 하나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아마 십년은 족히 된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버스가 낭떠러지로 굴러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모두 돌아가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매우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에 똑 같은 자리에서 어떤 남자가 떨어져 자살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버스에 자신의 아내가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남자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저승에서 만나리라는 희망으로 그 자리에서 몸을 던진 것입니다.

낭만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신앙인으로 보자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자신의 생명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기고 추수 때가 되어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주인이 멀리 있어 못 돌아올 줄 알고 그 밭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종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외아들을 보냅니다. 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위험한 곳임을 알면서도 외아들을 보내는 것은 가서 죽으라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무모하리만큼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이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아들을 인간들에게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주인이 오셨는데도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그를 잡아 죽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아들을 죽여야 자신들이 주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겐 심판거리가 됨을 깨닫지 못합니다. 당신의 아들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을 이천년 동안 나라도 없이 살도록 망하게 만드신 것처럼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옛 이스라엘과 같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죽이고 나서 그 벌로 서기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거의 몰살당하다시피 하고 나라도 없이 떠도는 민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이 주는 교훈은 주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내가 어떤 것의 주인이 되려고 하면 지금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모두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만약 종들이 그 포도원이 주인의 것임을 인정하고 도조를 바쳤다면 오래오래 그 포도원을 경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내를 잃은 것은 정말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거저 주셨던 것 도로 가져가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녀들, 재산, 건강까지도 모두 잃게 된 욥은 이런 자세를 취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

만약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는 신앙인이었다면 욥처럼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스스로 버리는 일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가 ‘봉헌’입니다. 봉헌이 없다면 신앙도 없는 것입니다.

카인의 경우가 이 경우입니다. 자신이 농사를 져서 얻은 것들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여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 가난해지고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아벨은 물론 이와는 반대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께 가장 좋은 재물을 바치니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종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십 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 (마태 23, 23)

십일조 내기가 아깝다면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것이고 온전히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완전하게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엔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먹어도 되도록 허락 되었지만 선악과만은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의 모든 행복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하느님께 속한 영역이었습니다.

우리 첫 조상은 그것까지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오늘 소작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주인이 되고 하느님이 됩니다. 사실 그들이 그것을 먹은 이유는 눈이 밝아져 하느님처럼 된다는 뱀의 유혹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국 주어졌던 행복도 빼앗기고 하느님나라도 잃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유일한 주님이신데 ‘내 것’이라 말함으로써 내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아이들도 내가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지 않았으니 나의 것이 아니고 재산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다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니 다른 것이야 어떻게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하느님 것임을 깨닫는다면 무엇을 잃었다고 슬퍼하며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잃고 마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잃었을 때 고통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무엇을 바치기가 아까워질 때 그것은 곧 잃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 로마에 유학 중이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복음 묵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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