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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대학 인본주의 국제 포럼 : 제3횔 이원길 베르나르도
작성자유웅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3-10-05 조회수470 추천수1 반대(0) 신고

생명 : 존재의 시작

 

가톨릭 대학 주최 제 3회 이원길 : 가톨릭 인본주의 국제포럼

 

오늘날 아버지의 위상이

점점 희석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번 10월 2일 가톨릭 대학에서 주최한

인본주의 국제포럼에서 발표된 한 가정의 형제들이,

 

아버지를 그리면서

마련한 "인본주의 구제포럼"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아버지들이 한번 읽어 보면서,

 

후손들에게

말로가 아닌 행동하는 실천의 삶을 살아야 겠다는 마음으로

"베르나르도 이원길 옹의 생애"를 이곳에 소개하려고 합니다.

 

베르나르도 이원길 옹은 자기 희생과 자신을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사신 분이다.

그는 매우 행복한 삶을 사셨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특히 정신적으로나 실질적인 면에서 개척자 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확고부동하고 깊은 가톨릭 신앙을 가지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 Maryland주 Gathersburg에서 2001년 11월 4일 84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큰 아들 이덕선 박사는 "적극적인 사고, 믿음, 그리고 소망"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이 아버지라고 이야기 하면서, 아버지 베르나르도 이원길 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저의 아버님께서는 불치의 낙천가 이셨습니다. 그의 삶은 낙천주의, 적극적인 사고, 믿음, 그리고 희망의 전형적인 본보기였습니다. 항상 작든 크든 간에 모든 것에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분이셨고 이 세상의 삶을 최대한으로 즐기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는 현재의 순간을 즐겼습니다.

그는 가진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그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결코 불평하지 않았으며,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성경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바른 말과,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농부, 사냥꾼, 낚시꾼 아마추어 엔터테이너, 그리고 준 의사였습니다.

그는 항상 꿈을 꾸는 개첮자였으며, 무엇인가 일을 만들려고 하였으며, 그리고 리더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착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일생에서 많은 것들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우선 튼튼한 가톨릭 성가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는세개의 가톨릭 교회 커뮤니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고향 동네의 문맹을 퇴치시켰습니다.

그는 많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장만해 주었습니다.

그는 갯벌을 천수답으로 변경하여 수백 가정의 주민들에게 농토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낙천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으며,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많은 것들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물잔의 반이 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반이 차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남과 누누고 남에게 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제가 보고 배운 아버님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저는 행복하고, 인자하고,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양육된 것을 매우 운이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이룩한 모든 것들은 제가 받은 훌륭한 가정교육과 특히 아버님으로부터 받은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 저에게 제 삶의 기초가 된 매우 귀중한 가치들을 심어 주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아들이 된 특권에 대하여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어떻게 해서 계속 긍정적인 사람으로 살수 있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항상 남에게 잘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베르나르도 이원길 옹은 1917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황해도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셨던 부친께서 돌아가셨는데, 8년 후 그가 16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와 형제들과 함게 연안 반도에 있는 갈인재라고 불리는 조그만 어촌 마을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은 1950년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을 탈출하여 강화군 교동도에서 1954년까지 3년을 살았다.

 

베르나르도 이원길 옹과 그의 가족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북한의 땅이 되어버린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로 이사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맏아들인 마태오 이덕선, 베드로 이덕성 셋째 아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198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갈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그는 미국에서 참으로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는 은퇴 후에는 아들과 딸들의 사업을 도와주었으며, 그리고 손자와 손녀들을 돌보아 주기도 하였으며, 그러나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그의 소명을 계속하였다.

 

베르나르도 이원길 옹을 추모하는 뜻으로 그의 가족은 Maryland주 Potomac의 매우 아름다운 곳에 수녀원을 지어 "The Little Sisters of the Holy Family"라는 수녀회에 기증하였다.

 

그는 92세인 부인 황 수산나, 5명의 아들과 1명의 딸, 그들의 배우자, 그리고 19명의 손녀, 손자, 증손녀와 증손자들을 남겼다. 그의 다섯째 아들인 바오로 이덕효 신부는 현재 워싱톤 대교구의 신부로 소임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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