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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과 악의 신비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18 조회수967 추천수1 반대(0) 신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고 악이 판치는 이 험한 세상에 과연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는 것일까?
 
 아마 이는 인류 역사이래로 가장 어려운 종교적인 질문일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왜 인간의 고통을 보시고도 가만히 계실까? 왜 나쁜 일이 그렇게 많이 생기는데도 침묵하고 계실까? 루벤스타인(Richard Rubenstein)은 그의 유명한 책 <After Auschwitz>에서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과연 유대인들이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고통을 겪고 악에 시달리는 것을 보시고도 미동(微動)도 하시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는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또 이에 대한 납득할 수 있는 많은 신학적인 설명도 있었다.
 
 예를 들면 유대인 랍비인 쿠쉬너(Harold Kushner,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권능을 사용하시지 않고 무한한 사랑과 선함을 보여주셨음을 상기시켜 이 의문에 대한 답을 하려고 하였다. 쿠쉬너는 하느님께서 하시려고 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도우실 수 있지만 하느님은 아무 때나 전능하심을 보여주시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고통을 중단시키실 수 없어서 아무 죄도 없는 착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다.
 
 많은 신학자들 중에서 특히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 루이스(C. S. Lewis), 떼이야르 드 샤르뎅(Theihard de Chardin)이 그리스도 신학을 다루면서 이 의문을 깊이 다루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유와 하느님을 존경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유익하게 보일 때라도 자유를 침해하시지는 않는다. 때로는 많은 고통을 겪게 하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같이 대신 고통을 겪어주시는 구원의 하느님은 아니다. 정작 죽음과 악을 만났을 때에는 서운하게 생각하게 되지만 바로 구원해주시지는 않는다. 라자로의 죽음에 대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이는 복음이 특히 강조하는 대목이다.
 
 라자로의 누이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리는 전갈을 예수님께 보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만나러 즉시 뛰어가시지 않고 라자로가 죽은 후 이틀 이상이나 지나서 그를 만나러 가셨다. 예수님이 집 근처에 당도하시자 마르타가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저의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녀가 한 말의 뜻은 주님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고 계셨습니까? 왜 빨리 오셔서 그를 낫게 해주시지 않았습니까?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지 않고 틀림없이 라자로가 살 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신다.  
 
 마르타는 주님을 만나 뵌 후 바로 언니 마리아를 부르러 갔다. 마리아가 도착하자 마르타와 꼭 같은 말을 하였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동생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더욱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마리아는 과거부터 누구나 갖고 있던, 고통과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안타까움을 털어 놓은 것이다. 저의 동생이 죽을 때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하는 마리아의 질문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의문이다. 즉 누구나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형제가 죽어 가는데 도대체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하는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괴로워하시면서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께 보여드리자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그것이 그들의 고통에 대한 주님의 답이었다. 주님께서는 아무 희망도 없이 괴로워하는 누이들 안으로 들어가신 다음 라자로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 사이에서도 꼭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조롱을 받고 놀림을 받으셔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구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후 부활하시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두 죽음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부활하게 하셨다.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는데도 우리들의 죽음과 고통에 반드시 관여하시지도 않고 구원하시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들이 고통을 겪고 한참 지난 뒤에 대신 구속(救贖)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고통에 무관심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들이 어느 정도 이상 믿음을 갖고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신비이다. 용서와 믿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믿음에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문에 대한 답을 절대로 알 수 없게 된다.
 
 내가 지금 말장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을 돌보고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게 또 잔인하게 상처를 받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고통과 악에 대한 신비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데 대하여 비록 예수님께서는 아무 설명도 하시지 않고 마리아와 마르타와 함께 무력함을 느끼시고 함께 괴로워하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시지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나중에 모두 잘 되고 하느님의 우리들을 포옹하심으로써 고통을 대신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롤하이저 신부님의 칼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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