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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돌아가라, 그대들의 저 빛나는 일상으로” - 4.1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11 조회수468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11.4.11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다니13,1-9.15-17.19-30.33-62 요한8,1-11

 

 

 

 

 

 

“돌아가라, 그대들의 저 빛나는 일상으로”

 

 

 

누군가 금강경을 한 마디로 요약한 말입니다.

 

“돌아가라, 그대들의 저 빛나는 일상으로”

 

따사로운 봄 햇살에 봄 냄새, 흙냄새 참 향기롭고 싱그럽습니다.

헐벗었던 배 밭도 초록빛 생명의 옷으로 입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빛나는 일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초봄의 수도원 풍경입니다.

문득 어제 복음 중

죽은 라자로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께 말한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

 

시체의 죽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이, 마음이 죄악으로 상해도 역한 냄새가 날 수 있겠구나,

영적후각은 이를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말이

‘후광(後光)’ ‘아우라(aura)’이었습니다.

기독교나 불교를 막론하고

예수님이나 부처님, 그리고 성인들의 그림 머리 뒤편에

둥글게 빛나는 부분이 ‘후광’이자 독특한 분위기의 ‘아우라’요

그 배경은 그냥 어둔 부분입니다.

마치 어둠의 악에서 보호하고 악의 어둠을 밝히는

은총의 빛 무리 같은 후광이요 아우라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중 특이한 점은 바로 이 빛과 어둠의 대조입니다.

언제나 어둠의 배경 안에

은총의 빛살 안에 있는 성인들의 빛나는 모습입니다.

악의 어둠으로부터 성인을 보호해주는 후광과도 같은 은총의 빛입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배경한 삶이라도

주님의 빛, 후광 안에 살아갈 때 보호되는 생명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도 이런 관점에서 묵상했습니다.

독서와 복음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면

마치 어둠의 악에 포위되어 있는 은총의 빛 같습니다.

어둠의 악한 세력에 포위되어 있는,

그러나 은총의 빛 안에 있는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수산나요

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처지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신뢰의 관계와 함께 가는

보이지 않는 은총의 빛 후광입니다.

다음 대목이 바로 수산나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수산나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기도의 여인’이었음을 봅니다.

주님께서는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다니엘이라는 젊은 사람 안에 거룩한 영을 깨우시어

마침내 수산나를 사지에서 살려냅니다.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은총의 빛이 배경의 악의 어둠을 빛으로 바꾼, 해피엔딩의 결과입니다.

은총의 빛 후광이 배경의 악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복음 장면도 이와 흡사합니다.

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 둘 다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인간적 지혜로는 이들 악의 덫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은총의 빛 안에 살아가는 주님께 하사된 천상지혜입니다.

이들의 질문에 침묵으로 대답하며 땅위에 글씨를 쓰는 예수님입니다.

침묵은 자비이며 지혜입니다.

서로의 흥분을 가라앉히며

밖으로 향한 시선을 자기 안으로 향하게 하는 침묵입니다.

아마 주님은 고발한 자들의 죄를 땅위에다 쓰셨을 것입니다.

들어난 여인의 죄보다

들어나지 않은 고발자들의 죄를 직시하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란 땅위의 글씨처럼

하느님의 손으로 쉽사리 지울 수 있는,

하느님 보기에 죄의 크고 작음은 도토리 키 재기 현실임을

깊이 통찰하셨을 것입니다.

죄 넘어 사람을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죄 없어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로 구원입니다.

죄 없어 구원 받기로 하면 구원 받을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주님은 이들을 단죄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돌아보게 했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는 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다 떠나갔습니다.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악의 세력 같기도 하고

은총의 빛 안에 사라지는 죄악의 어둠 같습니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위의 예수님과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장면이

온통 은총의 빛 안에 있는 듯이 보입니다.

마침내 과거는 불문에 부치시고

무죄선언과 더불어 새 삶을 촉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자기를 몰라서 단죄지,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죄를 알면

용서와 이해할 뿐 결코 무자비한 단죄를 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가 누구를 단죄합니까?

고발하는 자들에 이어 간음하다 잡힌 여인까지 단죄하지 않음으로

모두의 자존심을 지켜주신

상생(win-win)의 천상지혜를 발휘하신 자비와 지혜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총의 빛으로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시고

오늘도 주님의 후광(後光) 안에,

주님의 아우라(aura)를 발산하며 빛나는 일상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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