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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6 조회수572 추천수2 반대(0) 신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루가 9,18-21)

 -유 광수 신부-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유럽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교회의 발전과 한국인의 열심한 신앙 생활에 감탄하고 놀라워한다. 한국 교회는 살아 있으며 아시아의 선교는 한국 교회가 맡아야 한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과연 우리 한국 교회는 살아있고 아시아의 선교를 떠 맡을 만큼 성숙한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비록 유럽 교회가 잠자고 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내가 만나 본 유럽인들의 심성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적인데 비하여 한국 교회는 겉으로는 크게 발전한 것 같지만 안을 들어다 보면 왠지 미성숙하고 그리스도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은 생각하는 사고가 그리스도적이고, 몸에 벤 생활 자체가 그리스도적이고, 그네들의 문화가 그리스도적이다. 그네들의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그리스도적이다.
 
거기에 비해 우리 나라는 어떤가?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 온 것은 불과 2백년이 조금 넘었다. 그 중에서도 약 백년동안의 박해와 교회 제도상 외국 선교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적인 신앙 교육을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받을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은 본래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유교, 불교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우리들의 사상이나 마음까지 완전히 복음적으로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열심하고 희생적이고 생명을 바쳐 순교까지 하는 열성은 있지만 그것은 소수일 뿐 일반적으로는 복음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상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느낌이고 우리의 심성에까지 촉촉히 적셔주지를 못하고 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지금도 복음보다는 불교적인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이 더 많이 마음에 와 닿고 쉽게 이해하고 친근감을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우리들의 신앙은 어설프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고 왠지 급조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런 것들이 더욱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한 분"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네들의 의식 세계를 볼 수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마만큼 군중들과 제자들의 의식 속에는 한결같이 구약 성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만일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물었다면 누구라고 대답했을까? 석가, 공자, 단군, 위대한 성현 중에 한 분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유교, 불교적인 문화 속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인 복음은  아무래도 낮 설은 것 같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리스도란 구세주라는 뜻이다. 즉 당신은 나의 구세주이십니다.라는 고백이다. 사실 이 말은 엄청난 말이다. 나를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이 바로 "나와 함께 계신 당신이십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연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신가?

 

많은 신자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실제 생활 속의 구세주는 따로 있는 것 같다. 재물이 구세주요, 권력이, 명예가  그리고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애인이 구세주이다. 나의 취미가 구세주요, 나 자신이 구세주인 경우를 많이 본다.

 

맥루한은 "아무도 아무에게 아무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깨닫는 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라 배우는 이의 자세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많은 것들을 가르쳐 주어도 배우는 이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말이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 즉 배우는 이의 열성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어야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발전할 수 있는 법이다. 

 

아무리  나를 구원해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전하신다 하더라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나의 자세가 복음적이지 못할 때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다.

나의 고정관념과 전통적인 습관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발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과 제자들의 고백의 또 다른 차이점은 이런 것이다.  즉 군중에게 있어서 에수님의 존재는 절대적이신 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 중에 한분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절대적인 분이 아니니까 절실하게 믿을 필요도 없고 구세주라고 가지 고백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여러분들 중에 한분일 뿐이다. 그분이 요한 세례자이든 엘리야이든 옛 예언자 중에 한분일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분이냐?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고백은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에는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으신 분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군중들과 제자들과는 이런 엄청난 차이점이 있다. 군중들은 절대로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고 그분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이신 분인 예수님을 위해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을 버렸고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이고 그에 대한 고백은 나의 삶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과연 나에게 있어서 구세주는 누구인가? 이 말은 정말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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