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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5 토요일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12-24 조회수466 추천수0 반대(0) 신고

1독서<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7-10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시니, 땅끋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신다고 한다.

 

 

 

2독서<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으로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당신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

히브리서는 사도 바오로의 편지 형식과 달리 서두 인사도 없이 처음부터 초대교회의 장엄한 강론 형식으로 시작한다. 머리말인 1.1-4는 하느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즌가를 설명하면서 구원의 역사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본질과 역할을 제시한다.

 

1

하느님은 오랜 세월 동안 꿈. 환시. 사건. 상징 등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 뜻을 밝히셨다. 계시 방법이나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 계시가 완전하지 못하다느 뜻도 들어 있다.

 

원문은 예언자들 안에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으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와 같은 말이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예언자들 안에 계시며 말씀하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예언자라 하면 사무엘.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등 구약의 예언자들을 일컫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대변인들이었다(11.32 참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처럼 널리 알려진 조상이라기보다는 넓은 의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을 말한다. 이 조상들은 신약의 백성과도 관계가 있다.

 

2

마지막 날은 하느님이 인류 구원을 완성하시는 종말시기를 말한다.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종말시기가 도래햇다고 보았다.

 

웜문의 아들에는 정관사가 없는데, 이는 아들이 어떤 분이며 어떠한 일을 할 분인가를 명시하리라는 예고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 예언자들의 계승자 및 완전한 예언자로서 그분의 가르침과 활동을 비롯한 생애 전체는 직접적인 하느님의 말씀이다.

 

아들이 상속자라는 개념은 시편 2,8을 반영하지만 고대의 관습법을 말하기도 한다. 사도 바오로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상속자이실 뿐 아니라 만물에 대한 전권을 가진 상속자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

 

세상은 원어는 아이온. “온 세상또는 시대”.“시기를 뜻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상속자이며 하느님과 더불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다.

 

3

3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종의 시로서 그 언어나 사상은 지혜 7,25-26 및 그리스의 지혜 사상과 로고스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저자는 이런 표현이나 사상을 빌려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인가를 하느님과 세상 및 구원 역사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지혜7,25-26의 어휘와 비슷한 이 두 상징적 표현은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면서도 구분되는 분임을 나타낸다. “광채는 어떤 사물에서 발하는 빛이다. “표상은 어떤 사물이나 실체를 그대로 반영하는 상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그만큼 밀집한 관계를 지닌 분이며 하느님 자신이시다.

 

직역은 그의 능력과 말씀으로”. 여기서는 하느님이나 아들둘 다 가능하나 문장 전체의 내용으로 보아 아들을 가리킨다. 이 아들은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또한 그 말씀의 힘으로 세상을 파괴와 멸망으로부터 보호하고 통치하신다(지혜 43.26).

그리스도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 세상의 죄를 씻어주셨다.

 

시편 110.1을 인용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전례적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드높여지고 천상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셨다.

 

4

구별되는 이름또는 다른 이름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구별된다는 것은 뛰어나다는 의미도 있다. “이름은 신분, 지위, 품위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구원의 역사에서 특출한 존재로, 존경을 받는 천사들도 감히 누리지 못한 아들이라는 이름을 받았기에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시다. 머리말을 끝맺는 이 구절은 2.5-3.28의 주제를 예고한다.

 

천사들보다 뒤대하신 하느님의 아들

1.5-2.18은 본문의 첫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저자는 이 항목에서 초대교회의 기본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왕이며 메시아이심을 밝힌다.

 

먼저 2.5-24는 일곱 성서구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위대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한다. 초대교회는 이들 성서구절을 그리스도의 신분을 알려 주는 예언으로 간주했다.

 

5

시편 2.7. 이 시편은 왕 즉위식 때에 사용되었으며, 초대교회는 유다 랍비들처럼 이를 메시아에 관한 예언으로 해설했다. 구약에서는 왕이 즉위할 때에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지만, 그리스도는 천지 창조 이전에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되셨고 세례와 변모 때, 또 부활에 이 사실이 공적으로 확인되었다.

 

2사무 7.14; 1역대 17.13. 나탄이 다윗에게 한 예언인데 구약 본문에서는 아들이 솔로몬을 가리킨다. 쿰란 문헌에서는 이 아들을 메시아에게 적용시키며, 히브리서에서는 아들이 그리스도다.

 

6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는 그리스도의 강생이나 재림 또는 부활 후 성부 오른편에 앉으실 때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문맥이나 맏아들등의 표현으로 보아서는 부활 후의 즉위 때가 더 적합하다. “맏아들은 시편 89.28의 단어인데 랍비 문헌에서는 메시아를 비롯하여 율법, 아담, 야곱, 이스라엘 백성등을 맏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들 예의 공통적인 특징은 이 맏아들에 대한 하느님의 트별한 사랑이다. 히브리서는 맏아들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히브리어 구약 본문에는 이 말이 없으나 신명(LXX)32.43과 쿰란 성서사본에 약간 다르게 나타난다. 제자는 이 구절을 다른 종류의 성서사본이나 당대에 사용하던 전례문 또는 교리 전승에서 인용했거나 기억을 더듬어 인용했을 것이다. 그 내용으로 보아 왕 즉위식에 알맞은 문구인데, 저자는 이를 그리스도께 관한 말씀으로 돌린다.

 

 

 

 

복음<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5,9-14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머리말

이 머리말은 당시 공동체의 그리스도 찬미가 가운데 하나인 로고스’(말씀) 찬미가를 바탕으로 엮었다. 이 찬미가의 원형에 대해 의견이 다양하지만 1,3-4.9-11.14.16절이 거기 속했다고 추정된다. 추가된 내용 가운데 특히 6-8.15절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서 19절 이하와 직결된다. 로고스로 인한 새로운 구원질서의 계시행위 및 그에 대한 믿음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분리될 수 없는 부분이다.

 

마치 한 오페라의 서곡처럼 앞으로 전개될 요한복음 내용을 앞서 감지할 수 있도록 이끄는 역할을 한다. 루카복음이나 사도행전 및 요한 1서의 머리말과는 문학형식과 문맥상 전혀 다른 고유한 머리말이다. 그러나 특히 로고스의 선재와 육화, 창조와 구원행위 등을 미리 언급하여 앞으로 소개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도록 이끈다는 점에서는

 

마태오복음 서두에서 예수의 신비스런 탄생과 유년기를 보도한 의도와 맥락을 같이하며, 마르코복음 서두에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의도라고 할 수 있다.

 

1

창세 1.1과 같은 표현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창세 1.1에서는 창조행위의 시간적 시작을 뜻하나 여기서는 시간을 초월한 영원 속의 신적 실체를 뜻한다. 육화한 말씀의 선재성 곧 천지창조 전의 실존을 표현한다.

 

말씀은 한 인격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즉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동일시됨으로써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격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리스도론적 칭호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씀은 창조되지 않고 이미 영원 속에 절대적으로 실존에 계셨다는 뜻이다. 이 과거형은 선재한 그리스도를 고백한 시점에서 연유된 표현형에 불과하다. 이와 비슷한 표현법을 8.58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느님과 말씀의 위격적 일치와 결속관계를 뜻한다. 이 관계는 예수 자신의 입을 통해서도 언급된다. 이 관계는 또한 하느님의 실존에 참여한 말씀의 영광을 시사한다. 말씀은 영원 속에 실재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렸다는 것이다. “말씀의 이 영광은 예수의 기도 가운데도 언급된다.

 

말씀의 신적 본질을 언급한다. “말씀의 선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계시기에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육화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지상활동은 바로 이 본성에 근거한다.

 

2

1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으로서 문맥상 없어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 구절이다. 저자가 가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지상에서 계시와 구원 활동을 펼친 그리스도의 신원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

말씀이 하느님의 창조행위에 적극 동참했음을 듯한다.

창조에 있어서 말씀의 유일무이한 역할과 모든 창조물이 가치를 강조한다.

 

4

그것(생겨난 것)안에 그분은 생명이셨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으나 문법적으로는 이번역이 더 적합하다. 이런 매락 속에서 3ㄴ절과 4ㄱ절은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것. 그것 안에 그분은 생명이셨다라고 번역된다. 생겨난 것. 그것안에 그분은 생명이셨다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위 본문의 번역은 문맥상 매끄럽고 분명하다는 장점이 있다.

 

창조행위에 동참한 말씀은 또한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해서도 생명을 지닌다. 즉 모든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을 뿐 아니라 그 실존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속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분이 배척되는 곳에는 죽음만 있을 뿐이다.

 

말씀안에 있는 생명사람들의 빛으로 언급됨으로써 그 생명의 의미가 더욱 구체화한다. 생명은 서로 함께 결속되어 있고, “생명은 사람들을 위한 의 의미를 지닌다. “말씀은 사람들에게 생명이요 으로서 세상 창조 때부터 인간세계와 관계를 가진 것이다. 이 의미가 9절에서 다시 강조된다.

 

예수도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면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은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창조와 더불어 생명의 원천이요 빛을 주며,“생명은 인간을 위한 빛이고 은 인간에게 생명의 힘이다. “말씀은 창조뿐 아니라 인간 구원에도 참여하시며, 인간 구원은 창조 목적이다.

 

5

어둠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등진 인간세계, 곧 하느님의 빛에 의해 아직 비추어지지 않은 인간세계를 뜻하며, 또한 이런 어둠으로 인해 소경이 되거나 악의 세계로 타락한 인간 자신도 가리킨다. 따라서 어둠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결과다.

 

비치고 있다의 현재형은 과거형으로 서술된 문맥에 걸맞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말씀의 빛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인간에게 계속 비치고 있다고 말하고자 현재형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빛을 이기지 못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마치 어둠과 투쟁한 상황으로 오인될 수 잇기 때문에 문맥상으로나 내용상으로도 적당치 않다. 여기서는 이 인간에게 비치고 있으나 인간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인간의 결정적 거부를 가리킨다. 이것이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다는 현재형에 걸맞다. 즉 인간이 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했는데도 그 빛은 인간에게 계속 비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0

세상이란 말이 세 번이나 언급되는데, 그 개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세상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첫 번째와 세 번째 세상은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시공적 세상과 같다. 10절은 말씀과 인간 세계와의 관계를 언급한다. “말씀은 인간세계의 생명이요 으로서 인간이 알아볼 수 있도록 가까이 있었는데도 인간은 그 말씀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개념의 뉘앙스 차이도 여기서 좀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 시공적 인간세계로서의 세상, 창조된 모든 것을 가리키는 총체적 의미로서의 세상,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 총체적 의미로서의 세상, ”말씀을 알아보지 못한 인간들을 가리키는 구체적 의미로서의 세상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세상은 영지주의적 사고에 따른 이원론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11

10절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 구절로써 말씀이 세상에서 거부당한 극적 내용이 담겨 있다. 말씀은 자기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 곧 자기 영역으로 왔는데도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이 오히려 거부하고 나섰다. 달리 말하면 자기 영역에로 온 말씀은 모든 사람의 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 빛을 맞이하도록 결단을 촉구했지만, “말씀과 가장 밀접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에 맞서 결정적으로 거부하고 말았다. 여기서도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이 인간 편의 거부로 안해 결국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 시사된다.

 

12

11절과 대조를 이루는 구절로서 말씀을 맞아들이고 믿는 자들이 있엇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들은 말씀으로 인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힘을 선물로 얻게 되었다(1요한3,1-2 참조).

 

13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 의해 신비스럽게 이루어지는 초자연적 과정을 통해서라고 설명된다. 일부 사본에서는 태어나다란 동사가 다수 3인칭이고 오히려 14절과 관련되어 있다. , “말씀이 영원 속에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신비를 말하고자 한다. 아마도 예수가 동정녀로부터 태어났다는 신비를 두고서 말하는 듯하다.

 

14

14절은 로고스 찬미가의 절정이다. 1절의 말씀이란 표현이 그대로 다시 언급됨으로써 1절과 직접 관련을 맺고 또한 정녕이란 표현과 함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말씀육신이 되시어인간 가운데 거처하심오로써 그 말씀에게는 새롭고 유일무이한 사건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과 함께한 말씀이 세상에 현존하면서 활동하시다가 이제 인간의 영역에 몸소 오셨다. 따라서 정녕이란 표현에는 참으로, 실제로란 뜻도 내포되어 있다.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란 말은 말씀은 육신으로 되셨다와 비교하면 그 으미가 쉽게 파악된다. 후자의 경우는 말씀이 육신으로 생겨나와 그 주체가 육신으로 변화하지만, 전자의 경우는 말씀의 주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육신이 되신 말씀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는 표현과 그 말씀의 신적 영광을 우리가 보았다는 표현은 문맥상 이런 의미를 충분히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말씀이 육신으로 번성하여 나타났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말씀육신이 되셨기때문이다. , 육화하셨기 때문이다. “말씀의 존재양식이 변한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한 말씀은 이제 육화하여실제로 사람이 되셨고 나중에 다시 천상적 존재양식의 영광을 가지게 된다. 말슴의 육화는 인간들에게 천상적 계시와 신적 생명을 주기 위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란 말은 구세사에서 큰 전환점을 나타내고, 인간을 위한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이 열렸음을 뜻한다. “말씀은 왜 사람이 아니라 육신이 되셨다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도 설펴볼 만하다. 물론 육신이란 표현이 사람이 아니라 육신이 되셨다고 표현했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볼 만하다. 물론 육신이란 표현이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고유한 의미가 있다. 즉 지상에 얽매이거나 쉽게 사라져 버린다는 뜻으로 천상적인 것과 구별되는 인간적 실존을 가리킨다. 따라서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란 말은 아래와 위또는 지상과 천상으로 단절된 우주론적 이원론이 극복되었음을 시사한다.

 

, 말씀의 육화 안에서 천상적인 것이 지상으로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육화한 말씀 , 곧 그리스도는 지상에 얽매인 인간을 생명과 영광의 천상세계로 인도한다. 또한 이 육신은 그리스도 자신이 세상의 생명을 위한 설이라는 말과 함께 속죄제물을 시사하기도 하고 그리스도의 피흘린 십작상 죽음과 함께 말씀참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육신이란 표현 속에서 반영지주의적 색채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거쳐하셨다대신 천막을 치셨다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후자의 경우 문맥상 좀더 구체적으로 들린다. “말씀은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당했는데도 새롭고 유일한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서천막, 즉 거처를 마련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표상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느님의 거쳐가 마련되어 있다는 구약성서적 사고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명시한 내용을 연상시킨다. 아무튼 말씀참으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는 데에 위 두 번역 모두 일치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된 빛말씀은 육신이 되시어 모든 사람에게로 오셨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우리라는 말도 우리 가운데서와 같은 의미로 보면 인간 모두를 가리킨다. “우리 가운데서우리 인간 가운데서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화한 말씀의 영광을 보았다는 말을 놓고 보면 모든 인간이 아니라 육화한 말씀의 영광을 본 증인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예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예수의 표징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목격증인들이 육화한 말씀을 찬양한 신앙고백이다.

 

저자가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첨부한 구절마다 이제까지는 하느님으로만 언급되어 오다가 갑자기 아버지로 언급되는 점과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를 더욱 심도있게 표현하고자 요한복음만이 사용하는 독특한 용어인 (아들)”이란 표현이 이를 강하게 시사하다. 영광은 한마디로 아버지로부터 나온 (아들)”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 “영광(아들)”에게 속하고,“(아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관계를 지닌 이름이다. 따라서 천상적 영광이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의 것으로 언급됨으로 인해 지상에서 드러난 그 영광도 유일무이한 영광이라는 것을 뜻한다.

 

현 문맥에서는 (아들)”을 묘사한다. 그분은 인간을 결정적으로 돕고 구원할 능력, 은총과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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