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설교는 결국 순교다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1 조회수527 추천수5 반대(0) 신고
 
 
 
.
 
 
고통은 무엇진정한 인가?
과연 육체적인 고통일까?
과연 현세적인 고통일까?
아니다.
진정한 고통,
그것은 하느님의 손에서 떠나 있는 것이다.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이 있게 된 본래의 원인이 나에게서 떠나 있기 때문이다.
세상과 인간이 있게 된 원인은 하느님께 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괴로움이다.
사는 것이 힘들고 괴로울 때, 또는 마음이 불편하고 하는 일 마다 안될 때,
하느님이 나를 떠난 듯한 느낌이 들거나,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이 함께 해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가장 비참한 기분이 든다.
그런 사실을 오늘 복음이 말해주고 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란 바로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을 말한다.
언제나 그분 손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자기를 버려야 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한국의 순교성인들처럼 사는 것이다.
“사람들 눈에는 의인들이 벌을 받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고 제 1독서가 말하고 있듯이
수난과 고통의 삶을 이겨내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 멀어진 삶이 되지 않으려고
하느님과 반대되는 모든 행동을 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무조건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나의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부모나 형제가 모두 다른 종교를 믿기 때문에 우리 집안에 불화가 닥쳤다고 생각하는 허황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저 여러 종교들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도교를 세운 그런 분인가?
하느님이 그저 여러 잡신들 보다 조금 나은 그런 신들 가운데 하나인 그런 분인가?
그렇다면 이 세상은 여러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말인가?
도데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신이 수도 없이 많다는 그런 말인가?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다. 하느님은 하나이시다. 결코 둘 이상이 아니다.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순교성인들은 하느님을 버리라는 온갖 지독한 고문과 협박을 물리치고
순교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다.
구약성서 마카베오 상권(1장)에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한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이스라엘 전역에 이교도를 강요하는 칙령을 내린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성소 안에서 번제를 드리거나 희생 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도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부정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 더럽힐 것.
이렇게 하며,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국책을 바꿀 것,
그리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할 것”(1마카 1,44-50)
그때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이 명령을 어기고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너희가 어떻게 내 배 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준 것은 내가 아니며,
너희 몸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겨날 때 그를 빚어 내시고 만물이 생겨날 때
그것을 마련해 내신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비로이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2마카 7,22-23).
오늘 기념하는 한국 순교 성인들도 이에 못지 않다.
하나 같이 죽어가면서 남긴 말이
“천주공경 잘하고 천국에서 만나자”는 말이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것을 알고 그분이 가르치는 대로 살기 위한 것이고
죽더라도 결국 하느님이 생명을 도로 주신다고 믿으며 죽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교가 그저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든지 어려움이 있으면 다른 종교를 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면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우리와 함께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사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런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죄가 없고, 인간은 죄가 많기 때문이다.
송봉모 신부님이 말한 것처럼,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 가운데
첫 번째가 죄 안짓고 사는 것이고, 두 번째로 힘든 것이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게 죄 많고 서로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우리들인데,
하느님이 그런 우리가 되어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스캔들”이다.
죄 안짓고 못 사는 사람이라 누구나 다 자기에게 원수 같이 미운 사람이 생기기 마련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미운 사람과도 함께 계시니 마음이 혼란스럽다.
용서해야 하는데 마음 속에는 전혀 용서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으니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계속해서 그런 갈등을 겪게 되면 고통스럽다.
우리와 함께 우리와 똑 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사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엄청난 갈등과 고통을 겪게 한다.
사실 모든 사람은 사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믿지 않는 사람도 아직 신앙을 갖지 않았을 뿐이지,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는 마땅히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아직 자라나지 않은 지체, 잠재된 지체 같은 것이다.
그것은 씨앗과 같다.
지금의 모습은 씨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뿌리가 뻗어나오고 싹이 나오고 잎이 나오고
가지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게 된다.
아직 믿음을 갖지 않았을 뿐,
비신자들도 언젠가는 “씨앗”라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뿌리가 될 수도 있고,
잎이 될 수도 있고 가지도 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다.
따라서 장차 그리스도의 지체가 될 이웃 형제를 놓친다는 것은
몸을 잃었다는 뜻이고 몸을 잃었다는 것은 머리이신 예수님을 잃었다는 뜻이 된다.
어린이 미사때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어딜까요?” 하고 물었더니
대부분 머리라고 대답하는데, 유치부 꼬멩이 하나가 “꼬추요” 해서 와르르 웃었는데,
머리이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무(無)이다. 살아있어도 죽은 존재, 있어도 없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순교성인들은 배교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오늘 예수님 말씀 대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순교다.
피흘림이 없는 현대의 순교는 자기를 구하지 않는 것, 이웃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욕심을 버리는 것, 어려움을 견디는 것, 선행을 실천하는 것, 도움을 베푸는 것 등등이다.
그와 반대로 배교는 오직 자기만 구하는 것,
이웃을 물리치고 해치는 것, 어려움을 피하고 편리만 추구하는 것,
남이 보는 앞에서 성호경 하나 긋는 것도 망설이는 것 등등이다.
혹시 차를 운전하고 가는데 누가 끼어들 때,
화가 나도 참으면 순교한 셈이 될 것이고,
참지 못하고 욕을 한다면 배교한 셈이 될 것이다.
머리로는 확실하게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힘든 사실,
바로 이웃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