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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 안에서 일치의 삶" - 9.21,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1 조회수437 추천수3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9.21 연중 제25주일                                    
이사55,6-9 필리1,20ㄷ-24.27ㄱ 마태20,1-16

                                                
 
 
 
"주님 안에서 일치의 삶"
 


하느님 찾는 마음 절실할 때
삶을 대하는 자세 또한 절실합니다.

주일 아침기도 다음 시편 구절들,
노래할 때 마다 감동적입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여,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치올리리이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의 생각,
  밤샘을 할 때에도 당신의 생각,
  내 구원은 바로 당신이시니,
  당신 날개 그늘 아래 나는 마냥 좋으니이다.”
 
마침, 어제 수도원을 찾아 와 면담을 한
두 자매님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기어이 뵙고 싶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진정성이 가득 담긴 표정과 음성에 숙연해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나의 내면 깊이에 심어주신 게 하느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먼 데 계시는듯하지만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들,
무엇보다 먼저 찾아야 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1독서 말씀이나 화답송 시편,
모두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 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당신을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도다.”
 

과연 여러분은 누구를, 무엇을 찾습니까?

하느님을 찾아야 삽니다.
 
마음이 외롭고 허전하다는 것,
바로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표지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지금 여기,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 하느님을 찾아야 합니다.
 
한 번이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찾아야 활력 넘치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입니다.


세상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하느님을 찾을 때,
나를 알게 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게 되고
다양한 것들의 조화에 감탄하게 됩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르다는 것이 은총이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추석 감사미사 제단 앞 제사상에 차려진
온갖 가을 과일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다양한 과일들이 이룬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대로 이상적인 공동체를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큰 것 작은 것, 등근 것 길쭉한 것... 빨간 것 노란 것...등
다양한 색깔, 크기, 모습들이 이룬 조화의 평화와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온통 한 색깔, 한 크기, 한 모습의 제사상이라면 얼마나 단조로울까요.

작은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다 했습니다.
 
크고 잘난 것만 일류만을 추구하는,
착하고 평범한 자들이 설 자리가 없는
획일적 교육과 사회가 얼마나 인류에게 재앙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온통 힘 있고 큰 것만 살아남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아니요 결국 공멸로 가는 길입니다.
 
바야흐로 눈먼 자본주의의 종말의 징후가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지만
역시 우리와는 다른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어찌 하느님뿐 이겠습니까?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도 다 다르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을 자각할 때 비로소 겸손입니다.
함부로 하느님을, 이웃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내 생각을 일단 접고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느님의 마음을, 또 이웃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포도원 주인에게 항의하는 일꾼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상식으로 볼 때,
주님으로 상징되는 포도밭 주인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항의이지만,
그의 생각은 너무 짧았습니다.
 
이기적 편협한 자기의 안목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꼭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 같지 않습니까?
자기의 짧은 정의의 잣대로 하느님의 자비를 잽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이웃의 마음을 전혀 배려하지 못합니다.
 
진정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꾼이었다면,
자기 받은 몫에 감사했을 것이고
어쩌면 힘든 가장이었을지도 모를
한 시간 일한 노동자에 대한 주인의 후한 처사에 감동했을 것입니다.
 
이기적 나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지와 오해로 빚어지는 문제들 얼마나 많겠는지요.
 
주인의 짧은 대답이 우리에게도 깨우침이 됩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짧은 이기적 잣대로 재지 말고,
네 몫에 감사하고,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찾을 때
있는 그대로의 다른 모습들을 보고 받아들일 것이고 감사할 것입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추구하십시오.

주님을 찾을 때 주님과의 일치도, 이웃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주님과의 일치에서 발견되는 참 나요,
있는 그대로의 이웃의 모습니다.
 
하느님을 알게 되면 나를 알게 되고 이어 이웃을 알게 된다는 것,
이게 주님과의 일치의 열매입니다.

이 때 비로소 하느님 안에서 다양성의 일치를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화와 기쁨, 행복도,
이런 하느님 안에서 공존공생, 공존공락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경지에 이른 분이 바오로 사도이며
믿는 모든 이들의 목표 지점이기도 합니다.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도 이득이 됩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필요합니다.”

삶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참 놀랍습니다.
 
온전히 주님과 일치된 삶의 경지를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이기적 나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모습,
‘참 내’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찾으십시오.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주님과의 일치를 갈망하십시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을 찾는 모두 다른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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