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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21일 야곱의 우물- 루카 9, 23-26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1 조회수657 추천수2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3-­26)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못지않게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고민거리입니다. 예수님은 믿어야 할 진리이시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본받아야 할 인격이시며 따라가야 할 구체적인 길이십니다. 그분을 알려면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배워야 하고 그분 제자가 되려면 그분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 닮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 답을 가르쳐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9,23). 지금까지 제자들을 단속하는 데 여념이 없으셨다면 이제부터는 군중들 차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제자건 군중이건 구별이 없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을 버리라고 당부하십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무엇일까? 쉽게는 나 자신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보다 이웃의 가치를 높이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를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남이 소중해질 것 같습니다. 내 욕망과 내 이익을 쫓는 것이 가장 나를 위한 삶이라고 여겼던 가치관도 ‘던져 버려야 할 나’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버리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는 길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버리고 비워야 새것이 들어설 수 있고, 그래야 또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에서 분명 고난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곧 죽음을 향한 것이었고, 그래서 루카 시대에는 목숨을 내놓는 일까지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 때문에 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는 일상생활에서 겪는 난관과 반대와 모욕 등을 견디는 일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짊어질 십자가는 다름 아닌 나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따른다면 그분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 막막하고 고단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24절). ‘목숨’이란 것이 살고 죽는 명줄일 수도 있으나, 이 지상의 생명을 능가하는 생명, 죽은 다음에도 보존되는 그 무엇으로서, 영원한 생명일 수도 있고 자아나 인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과 맺은 인격적 관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 무엇이 내가 살 길인가? 살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사는 게 더 힘겨워지고, 움켜쥐면 쥘수록 다 놓친다는 것, 살면서 저절로 깨치게 되는 세상 이치입니다. 안간힘을 쓸수록 자신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인정받는 일에만 급급하고 배척받는 일은 피하여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결국 자기 영혼을 잃고 맙니다. 현재의 삶에 집착하다 다가올 시대의 더 가치 있는 삶을 놓치게 될 것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위해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이 세상보다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값진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예수님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결코 잃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25절) 온 세상을 얻으려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는다면, 하느님 대신 세상을 얻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세상 것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얻는 안정은 공허하고 허황되어 곧 허물어지고 맙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26절). 이와 비슷한 말씀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바오로는 당당히 외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6).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오실 사람의 아들은 세말의 심판을 집행하실 분입니다. 하느님을 등진 세상을 사람의 아들은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냉담하고 교회의 복음 선포를 경멸했던 이들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7절). 예수님의 재림을 열렬히 고대하던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더라도 교회 공동체가 복음 선포에 충실할 것을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신의 계획과 꿈을 포기하고 목숨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예수님을 따른 이들에게 돌아올 축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예수님 따르는 일이 밑지는 장사 같습니다. 고생문이 훤한 데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는 애초에 글렀습니다. 도대체 왜 이리 겁을 주시는 걸까요. 그런데 곰곰 곱씹어보니 예수님 말씀은 다 우리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참다운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진정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남는 길, 인간답게 사는 길,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내가 좀 포기하고 양보하면, 내 십자가 내가 지고 떳떳하게 예수님 믿고 그분 가르침대로 산다면, 나도 살고 우리 식구도 살고 이웃도 살고 세상도 산다는 것을요. 버리는 것이 버리는 게 아니고 잃는 것이 잃는 게 아니며 죽는 것이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치를 뒤집으십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실패를 통하여 승리를 거두시는 분이셨네요.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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