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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아편쟁이/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1-12-04 조회수465 추천수2 반대(0) 신고



우리 귀에는 원래 정신없이 빠르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탈리아 말인데 게다가 '법의학' 강의를 맡고 있는 젊은 법의학자는 강의록도 없이 얼마나 말을 빨리 하는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또 법률용어들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 졌다 싶었는데 갑자기 넘쳐나는 생소한 의학 용어들은 너무 어려워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일반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것들이 많다. 사실 이 때문에 공부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내가 요즘 여간 고통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게 아니다.

schizofrenia(조발성치매환자), ermafroditismo(자웅동체성), sclerosi multipla(다발성 경화증), isterectomia(자궁절개), cardiostenosi(협심증), prostatite(전립선염) 등등...... 한국말로 그 뜻을 설명하라고 해도 쉽지 않을 단어들과 싸워야만 하는 이 피할 수 없는 고통! 그래서 요즘 ‘법의학’ 시간만 되면 하늘에까지 닿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으로 인하여 벌어졌다는 ‘바벨탑 사건’을 다시 떠올리며 하느님과 인간 앞에서의 겸손을 다짐하고 있다.

순수 교회법학 분야의 강의들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설혹 수업 시간에 교수신부님들로부터 질문을 받아도 농담 섞인 답변으로 반 동료들을 배꼽 쥐게 할 만큼 여유를 부리며 건방을 떨고 있는 차에 ‘법의학’이라는 과목이 나의 교만에 태클을 걸어들어 와서 여지없이 첫마음으로 나를 되돌려 놓은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라는 말이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도 있다. 그렇다. 사람은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성숙한 사람이란 곧 겸손한 사람과 다를 바 아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고통은 이렇게 인간의 교만함을 치료해 주고 우리의 인격을 한층 더 성숙한 단계로 고양시켜주는 신비의 명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고통과 맞닥뜨리는 경험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언제 겸손을 배우고 언제 진정한 인격자로서의 모습으로 자기 스스로를 갖추어나갈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거쳐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당도할 수 있었고 예수께서도 세상에 나가기에 앞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40일 간 단식 수행하신 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다. 이 밖에도 수많은 스승들은 일부러 스스로를 극한의 고통으로 몰아넣는 체험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고 나면 오히려 큰 기쁨이 된다. 이러한 기쁨 속에 필연적 고통의 긍정적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렇듯 순작용을 하는 성령께서 이끄시는 긍정적 의미의 고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고통은 우리 인간들을 복수심에 불타는 잔인한 야수野獸로 전락시키거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마저 빼앗은 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간다. 이런 역작용을 하는 고통들의 뒤에는 여지없이 자유의지自由意志 - 아무 것이나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의지의 본 뜻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한다 - 를 거스르는 인간들의 악堊이 도사리고 있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나 르완다, 코소보 등지에서 자행됐던 ‘인종청소’ 혹은 지금 이 시간에도 태어난 순간부터 기아에 허덕이다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의 경우와 같이 인간이 악을 선택한 결과가 부르는 결코 씻을 수 없는 범죄의 고통은 직간접적인 동시대의 체험자 모두에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러한 성격의 고통마저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참아내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이렇게 인간이 악을 선택한 결과에 따르는 고통은 그것을 가능한 한 빨리 끊어버리는데 의미가 있을 뿐이다. 성령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악이 잉태한 고통에 대항하면서 겪게 되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인간들의 죄를 거슬러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끝내 죽음의 고통마저 받아들이신 겸손하신 신인神人으로부터 다시 진리의 빛을 보게 된 우리들이 마땅히 져야 할 십자가, 감내해야할 고통은 과연 무엇일까?

마르크스가 말한 대로 어떤 '종교는 아편'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결코 아편이 아니다.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몸짓으로 거부해야 할 악의 결과를 성령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고통으로 잘 못 이해하고 아편쟁이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약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잘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잘 깨닫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되기를 간절히 두 손 모은다.

“당신의 법이 나의 낙이 아니었더라면 이 몸은 고통 속에서 죽었으리이다.”(시편119,92)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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