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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진묵상 - 내가 알아내지 못한 죄 뿐만 아니라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07 조회수465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진묵상 - 내가 알아내지 못한 죄 뿐만 아니라
                                                                               이순의







저 그림의 어머니는 봄비 맞으며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왜?
남의 집 처마라도 신세를 좀 지시지
저 길가에서 저렇게 궁상스런 모습으로 젖을 물리고 있는가?

몇 년 전에
아들친구 엄마들 모임에서 제주도를 갔었는데
봄비 주루룩 주루룩 맞으며 저 어머니가 길가에서 저러고 있었다.
저 모습은 분명 요즘의 모습이 아니다.
저 모습을 보고
가슴 찡할 관광객은
나이가 지긋한 중년 이상의 세대가 되었을 게다.
나만 해도
아들에게 젖을 물려보기는 했으나
건강에 이상이 생겨 젖병 신세를 져야 했었다.
아무튼 옷차림으로 보나 앉은 모습으로 보나
지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내 나이도 어언 지천명을 지나고 보니
내가 무엇을 잘못하며 사는지는 안다.
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의 잘못도 보인다.
그러고보니 자잘못을 지적하여 사는 것도
젊은 객기가 난발할 때 말이지!
에구!
그러나 보다! 저러나 보다! 하며
덮으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피해서 산다.
그런데.......
나도 잘못이 있고 너도 잘못이 있는데
어느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하여 생각은 해 본다.



친척의 장례가 있어서
큰오빠가 오셨다.
자는 사람은 자라하고
큰오빠랑 막내랑 날을 새우고야 말았다.
가슴이 저미어 왔다.
어머니가 이 소리를 들으시면
에미 소리는 안중에도 없는 년이 오래비 소리는 들리냐고
악다구니를 쓰시고도 남으실게다.
처음 시작은
누나랑, 누나를 따라서, 어린 동생들을 돌보시던 기억들로
실타래를 풀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끝에 남겨진 여운은 아픔이었다.
막내가 듣는 큰오빠의 가슴!

내 삶이 어려웠고,
내 시가가 첩첩산중이었고,
내 능력이 모자랐으니
많은 것들을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며 살아야 했다.
간혹이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언니들을 통해 어머니의 입심이 전해졌고
그것조차도 나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어머니의 소리야 언니들만 들어 드려도 충분하고도 넘치실 것이라는!
그런데.......
어머니께서 큰오빠 집으로 옮기신 후로
큰오빠의 소리를 들어 준 적이 있는가?
단 한 번이라도
어머니의 입술을 통해 언니들을 거쳐 온 구구절절한 어머니의 소리 말고
큰오빠의 마음을 들어 드린 적이 있는가?
하다못해 어머니의 불편 사항에 대하여 해명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니
그 가정의 일거수 일투족이 노출이 되는!
참, 
심하다 싶을 때도 있을 만큼  
그런!
가림막 하나 없이
듣고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풍경조차도
나 여유롭지 못하다고 외면하고 살았으니..........

그 밤에라도 들어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큰오빠는 꼭 하고싶은 말 한가지만을 놓고
그 범주에서 넘지를 못하셨다.
내 시댁의 어머니와 시동생들이
떼거지로 몰려 앉아 나를 천치병신을 만들적에도
짝꿍은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그러면안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었다.
아니 하지 않았었다.
그 한스런 상처에서 아직도 헤엄치고 있는 나로서는
친정엄마나 오빠에게는
관심 끄고, 신경 끄는 것이 최고의 상책이라는
지론가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식은 부모가 목숨을 걸고 기르게 되어 있다.
내가 에미 되어보니 그렇고
아무리 배신자라고 하셔도 어려울 때면 내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거적데기에 누우시지 않고
밤이면 깨끗한 침대에 누워 주무실 수 있으시니
어머니 생각은 생각으로 담아두고
내 자식 거두러 맨발에 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런데 막내가 53세를 먹었다.
순서대로 죽는다 해도
막내가 살을 날 보다 죽을 날이 가깝다.
아니다.
조카들이 손주들을 낳아서 키우느라고 
제 인생길만을 목표해 살지는 않을 것이다.
제 새끼들의 길을 걱정하고 키우고 열어주느라고
벌써 저만치에서
아빠 엄마보다는 제 새끼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마음 안에서
방향이 달라져도 한참을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83세 노모를 모시는 61살 큰오빠가 목구멍 까지만 말을 담고
가슴을 쥐어 짜신다.
슬픔이다.
<큰오빠, 제가 이번 사순절 목표로 화해를 정했는데요. 그 화해가 뭐냐면요. 제가 제 자신을 위로해 주고, 제가 제 자신을 알아주고, 제가 제 자신을 다독이는 화해가 이루어지고 성공하면요.  제일 먼저 큰오빠랑 화해하러 갈께요.>
이런 개떡같은!
땅 속에서 먼지로도 흔적없을 공자왈 소리만 읊어 드렸으니.......
시대를 넘어 세상의 모든 부모님들은 
특히 어머님들은 훌륭하다.
훌륭한지 다 알고도 자식이 그 어머니께
똑같이 돌려드릴 수는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논한다면 그것은 대죄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대죄를 지으며 살고 있다.
배신자다.
나는 내 어머니께 배신자가 분명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누구보다 병약한 나를 살리시려고
얼마나 지극정성을 다 하셨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큰오빠께서 나보다 형편이 나으시니
내가 굳이 친정어머니 걱정을 해 드릴 만큼의
자유를 갖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배신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도 내 아들을 위한다고
내새끼가 우선이라고, 내 짝꿍하고 살련다고,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일구며 살아냈다.
그랬을지라도
내 아들이 나의 배신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내 아들은 큰오빠처럼 나와 한 집에 살려하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내아들을 배신자로 몰아 세우고 싶지않은 마음이다.




짝꿍이 얼마 전에 일가친척에게 험한 소리를 듣고 왔다.
그런 소리를 주고받는 일가친척이 누구인지 캐묻고 싶었지만
세월은 또 그런 것도 비켜가는 법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 말씀을 어머니께서 하셨든지 말았든지!
최종의 모든 짐은 다 짝꿍에게로 오고
그 짝꿍을 거들어 짐을 덜어주는 사람은 나 뿐이다.
친정어머니께 내가 배신자가 아닌 효녀라 해도
큰오빠의 짐이 나에게 오지는 않는다.
그 짐을 덜어드릴 수도 없다.
새언니만이 동반자 되어 나눌 수 있는 짐이다.

딱 하나!
큰오빠가 막내동생에게 저녁내내 토하신 주제는
딱 하나였다.
더 많은 토악질이라도 들어드리려 했지만
큰자식의 견딤은 하나를 가지고 날밤을 새셨다.
그러면 안되지만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되지만
<우리 시어머니는 큰아들이 죽어야 정신이 드실거고, 우리 친정어머니는 큰아들이 망해야 정신이 드실지 모르것네.>
라고 푸념을 하고 말았다.
그 불효자에 꼴도 보기싫은 큰아들 있어서
시어머니는 양로원에서라도 사실 수 있는거고,
그 불효자에 꼴도보기 싫은 큰아들 있어서
친정어머니는 기세가 하늘로 오르시나 보다.
그래도 큰오빠께 단 하루라도 엄마를 모시겠다고
말씀 드리지 못했다.
말씀 드리지 않았다.
내가 내 손으로 시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보내진 않았다지만
다 짝궁보다 잘난사람들이 왈가왈부해서 마음대로들 했다지만
시어머니도 안모시는 년이 친정엄마는 모시더라는 
그 헛말을
내 양심으로도 허락하고 싶지 않아서였고!
참 변명할 핑계가 많기도 하다.
그러니까 배신자것지! 




나 죄인인 것은 슬프지 않은데........
내 짝궁처럼 큰오빠도 어머니의 많은 것을 다 들출 수는 없어보인다.
그게 자식이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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