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강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작성자장병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20 조회수734 추천수2 반대(0) 신고

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
[ 평화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찬미 예수님..  평화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이동하여 경축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이나 종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목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순교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들 뿐만 아니라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순교자들과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흔히 순교자의 죽음은 죽었다고 표현되지 않고 하늘나라에서의 태어났다, 하늘나라에서의 생일이라고 표현됩니다. 많은 분들에게 한국의 순교 성인 성녀들에 관해 어느 분이 있으신지를 이름 외쳐 보라고 질문을 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 명 이상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례명으로 쓰고 있는 많은 외국의 성인, 성녀들은 잘 알고 있지만,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삶을 마감한 우리나라의 신앙선조들 특히 순교성인들을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84년 5월, 103위 한국 순교자 성인들의 시성식 자리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여러분 나라의 참된 아들딸입니다. 그분들은 혈통으로나 언어로나 문화로나 여러분의 조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들은 피로써 증거한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의 부모들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절두산에서 머리가 수없이 잘려 한강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새남터에서 서소문에서 머리가 잘려 다리 위에 걸어두어 천주교를 믿으면 모두 이렇게 된다고 선전포고를 해도 신앙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죽음이고 바보 같은 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1독서 지혜서의 말씀처럼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고난으로 생각될 것이며,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으로 생각되겠지만 의인들은, 우리 신앙 선조들은 평화를 누리며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불멸의 희망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이 받은 고통은 후에 받을 큰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순교의 월계관을 쓴 신앙선조들은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그 아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위에서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저 세상의 삶에서 보다 행복하고 보다 기쁘고, 보다 영광에 휩싸일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2독서에서 이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험이나 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순교자들이 하나뿐인 생명을 걸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입니다. 성령께서 내려주신 신앙의 힘 때문입니다. 그 신앙은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를 위해서 순교하신 김대건 신부님 그리고 모든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묶인 이들을 해방시키시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시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받게 되는 박해를 용기있게 기쁘게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인으로서 현세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권력도 명예도 재산도 가족도 모두 버린 순교자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배교를 강요받을 때 차라리 믿음을 간직한 채 죽는 것을 택했습니다. 용서하기보다 미워하고, 칭찬하기보다는 험담한다면 신앙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순교자들은 한 순간의 죽음으로 위대해진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의 깊은 신앙과 실천으로 신앙인의 올바른 생활을 보여주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셨고 마지막 죽음까지 예수님을 닮으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고 예수님처럼 죽어가는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이 날을 통해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더 교묘하게 우리의 신앙이 위협받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서. ‘예수님 믿고 죽을래’, ‘예수님 안 믿고 살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우리에겐 박해시대와 같은 외적인 문제는 적습니다. 내적인 문제. 바로 내 안의 문제가 훨씬 더 크다는 점입니다. 내 안의 내가. 나의 신앙을 박해한다는 점입니다. 내 안의 내가 박해를 받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작게는 일반 음식점이나 학교에서 성호를 자신 있게 긋지 못하고 밥을 먹는 것, 또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딱 편을 갈라놓고선 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대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막상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하느님 안에서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혹은 한탄으로, 때론 욕설로 받아드리는 것 등이 나 스스로 나의 신앙을 박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내가 나를 예수님 믿는 사람으로 드러내지 못한다는 문제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말할 목소리가 적다는 문제, 나에게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낼 삶이 없다는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한국 순교자 성인이 있다는 것은 그분들의 꿋꿋한 신앙을 따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나를 버리고 매일 겪는 자신의 십자가인 고통과 아픔, 힘들고 어렵게 하는 짐을 지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라는 하느님의 새로운 부르심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임을 드러내며 삽시다. 예수님을 힘차게 이야기 합시다. 예수님의 삶을 바로 이곳에서!! 나를 통해서!! 재현해 봅시다..

순교자의 후예로써 우리 용기를 냅시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이런 점에서 다시 마음을 잡고 한 주간 살아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 앞에 닥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이번 주간은 싫지만 꼭 해야 될 일, 싫지만 누군가가 해야될 일, 싫지만 했을 때 분명 옳은 일, 분명 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런 일들을 하고 난 후 분명 주님께서 기뻐하실 일에 한 번쯤 신앙 안에서 용기 있게 해 봅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지만 나와 내 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아간다면 나도 그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아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성인의 통공 안에 있는 가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 

( http://예수.kr   ,  http://마리아.kr )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