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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이 미사의 은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26 조회수1,149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 주일은 타 본당에서 저녁미사로 봉헌해 지켰습니다. 원래는 약 1년 정도 제가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 일에 집중하려고 잠시 떠나 글 올리는 것을 보류하려고 했습니다. 그 사이에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생활묵상이 몇 차례 있었는데 1년 동안은 자제하기로 했기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미사를 봉헌하면서 새로운 느낌이 들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2주 전에 이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원래 이 본당에는 보좌 신부님이 계신데 언제부터 저희 본당도 마찬가지이지만 주일미사 참례 인원이 500명이 되지 않으면 보좌 신부님을 둘 수 없다는 교구 방침이 있어서 주임 신부님 혼자만 사목하시는 그런 상황입니다. 근데 그날은 신부님 한 분과 같이 집전하셨습니다. 보니 몇 년 전에 저희 본당에 보좌 신부님으로 계신 신부님이었습니다.

 

올해 인사발령을 보면 외국에 공부를 하시러 나간 걸로 알고 있는데 어찌 이 본당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2년 전에 프로치운쿨라 행진을 할 때 지금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산청 가까이 있는 어떤 공소에서 신부님을 우연히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다른 신부님과 함께 주일학교 여름 캠프 때문에 공소를 예비 방문하셔야 해서 우연히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뵙고 그날 처음으로 뵌 것입니다. 이 신부님을 잠시 소개를 드리자면 보좌 신부님으로서 처음 저희 본당에 오신 것입니다. 강론이 아주 이색적입니다. 강론 원고도 없이 대부분 강론을 하십니다.

 

2주 전에는 보조만 하셨고 오늘은 보니 신부님이 직접 강론을 하셨습니다. 몇 년 만에 신부님의 강론을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강론이 깔끔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지금 이 본당에서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계시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강론은 약간 원고를 가지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본당에 계실 때 강론과 비교하면 조금 길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이제 세월이 흐르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원래 보통 때 강론을 들어보면 강론 원고가 없다고 해서 강론을 암기를 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딱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보통 이 신부님의 강론은 누구나 들어봐도 좋은 평가를 하십니다. 예전에 이 신부님이 타 본당으로 가시고 난 후에 다른 보좌 신부님과 신부님 방에서 한번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이 신부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먼저 이야기를 한 게 아니고 그때 보좌 신부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이 신부님은 따로 철학을 전공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강론에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결합해서 강론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봤을 땐 전체적인 뼈대를 그리고 나서 살을 붙여가는 방식으로 강론을 하시는 스타일입니다. 강론 원고를 단순히 읽는 강론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컨택이 가능한 강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아이컨택이 없는 강론은 죽은 강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 내용이 주옥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살아 있는 강론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강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서두에는 오리게네스의 일화를 설명했습니다. 자기 몸의 일부를 잘랐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부분이라고는 상세히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용을 모르면 잘 모를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예전에 평화방송에서 강길웅 신부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서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분은 이것만 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성인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처럼 복음을 문자로만 해석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시는 오류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와 함께 오늘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이기도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성모님 요셉 성인 세 분의 이야기를 난민에 비유해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난민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강론이 참 특이한 묵상이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그 내용도 난민에 비유하신 대목은 아주 특이한 내용이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도 사실 따지고 보면 난민과 같습니다. 신부님께서는 표현을 달리 하셨는데 제가 좀 부가적으로 표현을 하자면 우리는 편하거나 또 재물에 신경을 쓰다보면 자신이 난민이라는 걸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쪽으로는 강론을 들으면서 또 한쪽 머리로는 느끼는 게 있었습니다. 아마 cpu가 세 개 정도 돌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멀티 기능을 한 것입니다. 아주 긴 강론은 아니었지만 강론이 어떤가에 따라서 그날 미사의 기분을 좌우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강론 말미에 뭔가 온전히 미사를 봉헌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이 느낌 때문에 오늘 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이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짧은 강론은 아니었지만 오늘 생각한 게 있습니다. 이 신부님의 강론처럼 짧아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강론이 있는가 하면 긴 강론에도 배가 산으로 가는 강론도 있습니다. 아마 근 6년 만에 이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만 신부님들께서도 다 은사가 다 다릅니다. 매번 훌륭한 강론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최소한 주일미사 강론만큼은 감동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신자들을 위해서 앞으로 일주일 동안 살아가면서 필요한 영적인 식량은 될 수 있는 강론이 되었으면 하는 게 보통 신자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강론이 부실하면 미사의 은혜가 반감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미사의 은혜가 강론에 좌우되는 것이라고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실제 일반 신자가 피부로 느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강론을 제외하면 모든 미사의 형식은 다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부님이 아니라서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신부님들께서 강론 준비하시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어떤 전례 시기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빵 이야기가 계속 나올 때는 가장 힘들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건 단순한 비근한 예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강론의 중요성을 언급하셨습니다. 물론 그날 복음이 핵심이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강론은 개신교 교회의 설교와 달리 주로 복음에 한정해 강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지 않아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민을 하고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면 분명 훌륭한 강론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훌륭한 강론은 묵상 시간과 비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강론에 은사가 없다고 하신다고 해도 많은 시간 묵상에 투입하면 설령 감동적인 강론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강론은 분명 될 거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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