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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눈에 불을 켜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1 조회수492 추천수4 반대(0) 신고
아주 자주 우리는 거울 앞에 서서 나이 든 표시를 찾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수가 많다. 자신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을 구석구석 뜯어 본다. 밤새 주름은 지지 않았는가, 눈두덩이가 처지지는 않았는가, 새치는 늘지 않았는가 하고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조사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버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바라볼 때에는 눈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 그 눈 안에서 자신이늙어가고 있는지, 또는 노망기가 있는지 없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늙은 표시를 찾아라. 그러나 다른 데를 보지 말고 당신의 눈을 쳐다 보면서 시간을 보내라. 어떻게 보이는가? 지쳐 보이는가, 열정이 식어 보이는가, 냉소적으로 보이는가, 무생물 같이 보이는가, 생기가 없어 보이는가, 무감각하게 보이는가? 거기에 혹시 카인의 질투는 없는가?
 
 눈에 불이 켜져 있는가? 아직도 열정이 불타고 있는가? 거울을 보는 것도 이제는 심드렁한가? 놀라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가? 신선함을 찾아 볼 수 없는가? 지쳐있는가 아니면 흥분하고 있는가? 청춘은 가고 없는가?
 진짜 늙은 표시는 눈에서는 볼 수 없고 피부에서 볼 수 있다. 축 늘어진 피부는 육체적으로 나이 들었음을 뜻한다. 중력의 법칙처럼 당연하게 몸도 나이가 들고 죽어가게 마련이지만, 눈이 내리깔려 있으면 영혼이 늙은 표시이며 몸이 늙은 것보다 더 늙어 보이게 된다. 그리고 덜 자연스럽게 보인다. 어쩐지 이상하게 보인다.
 
 영혼은 영원히 젊고 영원히 어린애 같고 영원히 신선한 것으로 생각한다. 영혼은 시들거나 죽지않을 것 같다. 그러나 권태와 권태의 산물인 냉소주의로 인하여 영혼도 죽을 수 있다. 열정이 부족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어린애 같은 면과 신선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절망이라 부르는 영혼의 피로함 때문에 영혼도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절망은 엉뚱한 면이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부족함 때문에, 인생의 고통 때문에, 그리고 너무 많이 갖지 못했기 때문에 절망하지는 않는다. 이 반대 이유 즉 기쁘지 않기 때문에 절망한다.
 어린애처럼, 영혼의 순수성과 함께 인생을 신선하고 새롭고 주요하게 느끼게 되면 기쁨이 있게 된다. 이런 형태의 기쁨에는 물론 즐거움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즐거움과는 다른 기쁨이 있다. 또 기쁨 없이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나 이런 즐거움은 감정이 순수하지 못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은 처음에는 순진성과 해방을 내팽개친 채 승리한 기분처럼 되지만 이내 패배의식으로 바뀌게 되고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권태를 느끼게 되고 정열이 사라지게 된다. 곧 무미건조하게 되고, 소금기 없는 간장처럼 되고, 계란으로 만든 카스테라(egg custard)처럼 되어 버린다. 그리고 입맛을 잃어버리게 된다.
 
 열정이 죽고 영혼이 피로하게 된다. 순진하고 신선해야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지만, 이러한 기쁨을 맛보지 못할 때에는 즐거움이 싫증나게 마련이며 아무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고 무감각하게 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고 열정이 없게 된다. 우리 안에는 신선하고 젊은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우리의 눈은 이것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즉 불꽃을 잃어버리고 어린애 같은 면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마가렛 로렌스(Margaret Laurence)는 그녀의 소설 <Stone Angel>에서 하가(Hagar)라는, 절망하여 무생물처럼 되어 있는 여주인공이 거울을 보면서 자기자신을 뜯어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변할 수 있는가를 무척 의아롭게 생각하면서 오래 동안 멍청하게 거울을 보며 서 있었다. 점점 더 나의 모습이 변해 갔다. 거울 속에 있는 가무스럼한 가죽 같은 얼굴은 분명히 내 얼굴이 아니었다. 오로지 눈만이 나의 것이었다. 거울을 뚫어져라 한참 응시하니까 거울 아래서 아주 멀리 느껴지는 어떤 참된 이미지가 보였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거울을 보면서 실제로는 우리의 것이 아닌 생기 없는 얼굴, 거울 밑 깊숙이 숨겨져 있는 우리의 따분한 눈을 보게 된다. 가죽 같은 피부,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초점을 잃고 먼 데를 보는듯한 멍한 표정의, 순진함과 신선함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얼굴과 눈! 우리의 불꽃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점점 더 그러할 것이다!.  
 
 왜 그리 되었는가? 이를 알려면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오래 동안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오래 동안 뚫어지게 응시해 보아라.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보아라. 우리들을 다시 신선하게 만드는 미지의 길을 향하여 움직이도록 해보아라. 자신의 편견, 냉소적인 자세, 부정(不貞), 억지 그리고 어른스러움을 버릴 때까지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만 쳐다 보아라. 거울 안에 어린 소년 소녀가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일 때까지, 거울이 뚫어질 정도로 자신의 눈을 응시해보아라. 그러면 놀라움이 다시 생기고, 불꽃이 다시 돌아오고, 동시에 새로움과 신선함이 다시 당신을 젊게 느끼게 할 것이다. 눈이 자주 감기기는 하겠지만 지치지는 않을 것이다. 나중에는 초점 없이 열정 없이 바라보게 될 것이다.
 몸은 지친다. 그러나 눈은 영혼과 연결되어 있어 현실이 엄습하기 전에는 눈을 부릅뜨고 불꽃을 퉁긴다. 눈은 항상 무언가를 보고 싶어한다.
 
 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그리스도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성자(聖者)는 항상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성인들은 항상 눈을 부릅뜨고 있다. 불교의 성자들은 매끄럽고 날씬한 몸매를 갖고 있지만 눈은 무겁게 내려 덮혀 잠자는듯하다. 중세의 성인의 몸은 야위어 우스꽝스럽게 보였지만 눈은 놀라울 정도로 살아 있고 무언가를 찾으며 응시하고 있었다. 불교는 내면을 바라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눈은 의도적으로 바깥을 보려고 한다.(롤하이저 신부님의 묵상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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