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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월 6일 야곱의 우물- 루카 24, 13-35/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06 조회수464 추천수6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안식일 다음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루카 24,13-­35)
 
 
 
 
하느님의 첫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나그네살이와 떠돌이 여정의 연속이었습니다. 성조들의 방랑과 이집트 탈출에서 가나안 정착까지의 광야 여정, 바빌론 유배와 예루살렘으로 귀환 여행이 대표적 예입니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을 오가는 여행을 계속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전도 여행 역시 루카복음의 큰 뼈대를 이루는 주요 구도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행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자리매김합니다.
엠마오 발현 이야기는 여행이라는 주제에 어울리는 특별한 본문입니다. 단순하게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여정이지만 내적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해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의 인생도 순례길이니 오늘 말씀은 여행에 필요한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바로 그날’(13절)은 빈 무덤을 발견한 날로서, 이 사건과 빈 무덤 이야기(1­12절)를 연결하는 단서가 되는 말입니다. 그날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뒤로한 채 엠마오라는 마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13절). 무덤에 다녀온 여인들이 천사들을 만나 들은 기이한 소식을 전하는 바람에, 제자들 무리 전체는 뭔가에 홀린 듯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14절) 그 무리에서 빠져나온 두 제자는 자신들이 겪은 허탈하면서도 영문을 모를 어마어마한 사건을 두고 이리저리 되짚어 봅니다. ‘왜 억울하게 돌아가셔야만 했을까? 시신은 누가 왜 가져갔을까? 무덤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이들이 하는 말은 무슨 소리인가? 그렇다면 도대체 그분은 누구시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일까?’ 사실 꽤 오래 신자 생활을 해온 우리도 가끔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토론 중에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다가와 함께 걸으십니다(15절).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무슨 일이냐?”(19절) 본격적인 대화의 장을 여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하였고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나서서 그동안의 일을 요약하여 설명합니다. 굳이 그의 이름을 밝힌 것을 보면 루카가 그를 앞으로 교회 시대를 이끌어 갈 대표 신앙인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째 답변에서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19절)로 소개합니다. 모세를 두고 하신 신명 18,`15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 시대에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오리라는 기대가 있었음을 은연중에 내비칩니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그들은 정치적 구원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21절) ‘사흘째’는 전환의 분위기를 이끌고 희망의 징조를 보이는 낱말입니다. 몇몇 여자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신은 찾지 못하고 천사들의 발현을 보았는데 그들이 이르기를 주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실망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생애와 정체, 죽음을 다시 성찰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25절)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제자들의 시야를 넓혀주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26절) ‘고난을 겪는다.’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고난을 가리킬 때 쓰였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영광’은 루카복음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속성으로서, 메시아가 수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간다는 사고는 루카 신학의 대주제입니다. 곧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수난을 통한 영광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설명해 주셨다.”(27절) 예수님은 모세의 책에서부터 예언자들의 책에 이르는 구약 전체를 개괄해 주십니다. 성경은 인간과 역사에 관한 하느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해석자이십니다. 이로써 구원의 약속과 세속적 구원자에게만 몰두하던 제자들의 안목을 넓혀주시고, 그들의 관심사를 바꿔놓으십니다. 목적지에 가까이 왔을 때 이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더 멀리 가시려는 듯하자 제자들은 그분을 말리며 청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29절) ‘붙들었다’라는 말에는 강요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나그네 대접 차원이기도 했겠지만 그들의 마음이 이미 예수님과의 대화로 많이 움직였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식사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이 구절에 쓰인 네 동사 ‘들다, 찬미드리다, 떼다, 나누어 주다’는 최후만찬 때 사용한 낱말과 같습니다(22,`19 참조). 부활 이야기에는 유독 식사 장면이 많습니다.
음식을 드시는 것으로서 그분이 부활하셨음을 입증하려 한 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봅니다(31절). 단순히 예수라는 사람을 알아본 것이라기보다는 그분이야말로 참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깨닫자마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31절). 사라지셨는데도 제자들은 그분이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들에게 현존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타오름’을 회상합니다. 성령을 체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엠마오로 향할 때 실망과 슬픔, 피로와 낙심으로 가득 찼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동안의 의문과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소명감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그분이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은,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공동체의 마음을 열게 하고 신앙인의 눈을 뜨게 할 것입니다.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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