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몸부림의 대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1 조회수536 추천수1 반대(0) 신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오 16:24-27)
 
 한 아마추어 나방 수집가가 나무 가지에서 희귀한 나방의 고치를 발견하였다. 그는 나무에 기어 올라가 나방의 고치들을 잡아 집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나방이 고치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고치를 조금 칼로 베어 나방이 나올 수 있도록 하여 나방이 나오기는 했지만 금방 나방이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가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들려 주니 친구가 말하였다.
“나방이 스스로 몸부림쳐 고치를 찢고 나오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네. 몸부림 치는 것은 나방이 자신의 몸을 만드는 과정인데 자네가 그것을 돕는 것은 몸을 만드는 기회를 뺏은 것이 된다네.”
 
 미켈란제로의 <잠이 깬 노예(The Awakening Slave)>라는 제목의 조각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바위에서 몸부림쳐 빠져 나오려고 하는 노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몸의 상반신은 이미 완전히 조각되어 있으나 나머지 몸은 아직도 미완성인 채 바위에 숨겨져 있다. 인간이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거의 자의식이 없고, 누구에겐가에 의존해야만 하고, 말도 못하고, 자신과 남을 알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무력한 어린애로 태어난다. 탄생의 순간 마치 바위에서 부분적으로 몸을 드러내는 것 같다. 우리들의 나머지 인생은 나머지 몸을 드러내면서 바위에서 몸을 빼내어 자유롭게 되기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인생은 쉽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아는 것이 별로 없고, 에너지도 제한되어 있고, 직감적인 이해도 부족하고, 정서도 부족하고, 도덕성과 인간관계도 부족하고, 생긴 것도 별로다.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항상 제동을 거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계를 느끼지 않는 단 한 곳이 있다. 돌을 맞지 않고 자유로이 날 수 있는 단 한 곳이 있다. 바로 우리들의 꿈 속이다. 밤에 자면서 꾸는 꿈이 아니라 우리들이 이상(理想)으로 바라는 꿈 속에서는 춤추고, 날고, 완전하게 사랑하고, 우리들의 한계를 뛰어 넘어 무엇이든 할 수가 있다. 꿈 속에서는 에너지의 제한도 없고, 사랑과 관계나 정서의 제한도 없다. 거기서는 바위에서 우리 몸을 완전히 빼내어 눈을 돌려 우리들의 실제 감옥을 바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지 않는다. 꿈꾸는 것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이 되어버렸다. 모두 현실주의, 시니시즘(cynicism), 절망에 빠져 있다. 꿈을 꾼다면 사람들이 웃으며 놀리고 순진한 어린애 같이 여기며 심지어는 불쌍하게 여긴다. 이런 사례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이고 순수한 행동에 대한 반응에서 볼 수 있으며 옛 시(詩)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더 이상 꿈꾸려 하지 않고 더 깊고 더 특별한 영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하면 오히려 비웃음을 받게 되며 불신을 받게 되며 순진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며 동정을 받게 된다. 어린애 같아! 정말 못 말려!
이러한 비난을 들으면 슬퍼진다. 80세의 아주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들이 아무런 꿈도 없이,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도 않으면서 별채에서 쓸쓸히 죽어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정말로 꿈을 갖기가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재능이 있고 아름답고 부유한 젊은 사람들이 꿈을 갖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든다. 절망, 그것도 젊은 사람이, 어떻게 꿈을 잃어버렸을까?
 
그리하여 이제 우리 주변에 꿈꾸는 사람이 없다. 우리는 현실과 절망을 혼돈하는 세대로, 순진하게 살지 못하며, 더러운 냉소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현실과 더 이상 싸우지 않으려고 한다. 현실주의자가 되어 깊은 관계, 진정한 낭만, 참된 공동체, 아름다운 사랑이나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절망하고 있다.
 
이상적인 것을 믿는 것은 마치 산타클로스나 부활절 토끼(Easter Bunny)를 믿는 것과 같다. 얼마나 어린애 같은가? 그리하여 우리는 차선책으로 이상적인 현실주의자들에게 더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결혼한 사람들은 배우자와 함께 더 이상 최적조건을 만들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차선책으로 배우자에게 덜 요구하거나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독신주의자들은 순진한 생각에 빠져 더 이상 독신으로 남아서 순수하게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다. 냉소주의적인 태도는 이상주의는 불가능하므로 불임(不姙)의 홀아비가 되거나 이중잣대를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모든 시니시즘은 절망적이지만 순수하고 단순하다. 비현실적인 것을 더 이상 꿈꾸지 않고 체념하며, 평범하고 부분적으로는 바위에 갇혀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산다. 절망은 위대해지는 꿈을 포기한 데 불과할 뿐이다.
 
이상적인 것을 믿지 않으면 단단한 바위 속으로 깊이 빠져버리게 된다.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이 말하였다. “진짜 죄는 하나뿐이다. 진실이 아닌 다른 것을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더구나 혼자만 꿈꾸어도 안 된다. 다 함께 꿈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꿈을 공유해야 한다. 혼자 꿈꾸면 꿈으로 남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꿈꾸면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함께 꿈을 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감옥에 갇힌 듯이 된다. 아무도 그 바위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는 없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우리는 꿈꾸어야 하며 그 꿈을 공유해야 한다. 즉 마음에 꿈의 성(城)을 지어야 하고, 이상적인 사랑과 공동체를 쌓아 올려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현실에서는 바위에서 빠져 나올 수는 없지만 꿈에서나 희망에서는 빠져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서서히 돌을 쪼아내면서 우리 자신이 더욱더 많은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면서 새로 태어나도록 조각해야 한다. 꿈을 꾸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 꿈을 통하여 방랑을 끝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인 몽상가의 헛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왜 젊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백일몽을 꾸고 바람직한 생각을 하지 못할까? 위대한 망상을 가진 사람의 시 낭송인가?
 아마, 실제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젊은 사람들이 꿈을 갖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꿈이 아니다. 요한 복음 제17장에서 꿈꾸는 자들을 만날 수 있다.(롤하이저 신부님의 묵상글에서 발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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