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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3(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 독서, 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22 조회수3,617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섰습니다. 다시 일으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여러분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시작입니다. 1,1-5.8-10

1 바오로외 실바누스의 티모테오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비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3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4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5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해제.역주 진토마스 신부님)

인사

인사말에서 바오로는 고대의 일반적 서가양식을 따른다. 고대 서간양식에서는 먼저 발신인. 그 다음 수신인의 이름을 쓰고, 끝에는 축원의 말을 적는다. 바오로의 다른 편지에서는 이 간단한 양식을 여러 가지 삽입문으로 확대한 습성이 엿보이는데, 거기에 비하면 테살로니카 1,2서의 인사말은 매우 간결하다. 특히 사도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바오로의 사도직을 문제시하는 사람들이 아직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갈라디아와 코린토의 사도들은 그의 사도직을 문제 삼았다.

 

1

바오로는 자기 협력자 실바스와 디모테오을 아무런 차별 없이 자신과 같은 필자로 열거한다. 실바스는 사도행전에서 실라라고 불리는 예루살렘 출신 사도요 예언자로서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오로의 협력자였다. 티모테오는 리스트라 출신으로서, 역시 2차 전도여행 때부터 바오로를 수행했다. 바오로는 그를 측근 제자로서 특별히 사랑했고 가장 중요한 심부름을 시켰다.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바오로가 애용하는 표현이다. 대부분 경우 그리스도 안에라고만 한다. 신도들이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특히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교회”.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이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일컬어 야훼의 모임혹은 단지 모압이라 했다. 이것을 흔히 교회라 번역했다. 편지의 대상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데살로니카 교회 전체다. 후세에는 지구상 모든 믿는 이의 모임을 교회라 부르게 된다.

 

사도의 인사말 중에 항상 은총과 평화의 이중중복이 나오는데 은총은 그리스인 개념이고 평화는 유다인 개념이다. 오늘날에도 유다인들은 인사할 때 평화라고 한다.

 

2

바오로는 으레 감사기도로 편지를 시작한다.

 

3

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신자활동을 드러내는 덕성이다. 본문에서 희망이란 말을 마지막에 든 까닭은 이 서간이 종말 대상을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4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포를 형제라 불렀고 예수께서도 이 관습을 따르셨다. 바오로는 신자들을 형제라 부른다. 특히 신도를 정답게 여길 때 즐겨 사용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공을 세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무조건 사랑으로, 즉 은총으로 선택하셨다. 이제 이방인인 데살로니카 사람들도 선택받아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되었다.

 

5

우리의 복음은 바오로의 복음선교 활동을 뜻한다.이 활동에는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가 따른다. “권능이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기적을 가리킬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구원능력을 가리킬 수도 있다. 따라서 복음선포는 설교만으로는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 성령이 작용할 때 비로소 힘이 넘치고 또 청중을 움직일 수 있다. 바오로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고 또 그들이 받아들인 것은 그들이 선택되었다는 표시다.

 

6

데살로니카 신도들이 환난 가운데에서도 ... 말씀을 받아들여서그리스도와 사도들을 본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또한 그리스 신도들이 모범이 된다. 어떻게해서 본받음의 관계가 형성된다. 목적이 없이 그저 믿는 이들이라 한 것을 보면 당시에 이미 그리스도이을 믿는 이시자라고 불렀던 것 같다.

 

환난이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사도 17.1=7참조.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으레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다. 유다인들은 세말 전에 큰 환난속이 이기리라고 믿고 있었는데, 종말에 대한 기대와 희망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사는 이 환난이 이미 닥쳐온 것이다. 화난 가운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성령이 마련해 주는 그리스도인들만의 특성이다.

 

말씀은 복음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하느님에 과한 말씀일 뿐 아니라 하느님이 들려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데살로니카 신도들이 환난 가운데서도 이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표시다.

 

8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 아카이아는 그리스 남부를 일컬으며, 각각 로마제국 속주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데살로니카 교회는 그리스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9

그리스뿐 아니라 팔레스티나와 안티오키아 등지에서도 모든 신도가 데살로니카에서의 복음선포에 관해 알고 기뻐하고 있다는 말이다.

 

9-10절은 이방인들에게 선포한 복음의 골자로서 바오로는 그 내용과 표현을 초창기 교회 전통에서 빌려왔다. 이방인들은 복음을 듣고 우상을 버린 다음 유일하신 하느님께로 도라섰다. 하느님은 생명 없는 허망한 우상과 달리 살아 계시고 진실하신 분이다 그리스도인 생활은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이요 하느님의 부활하신 아들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분 재림을 기다리는 생활이다. 10절은 바오로의 그리스도론을 요약한 대목이다.

 

10

장차 닥쳐올 진노는 재림과 심판 때에 죄인들이 받을 벌을 가리킨다.

 

 

 

복음<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드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물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나?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양모 신부님)

13

첫째 불행선언. 13절의 병행문 루카 11.52에 있는데, 마태오의 형태가 더 신빙성이 있다. 율사들과 바리아이들은 동족을 하늘나라로 인도할 권능과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들어가려는 동족에게도 하늘나라를 잠가 버렸다. 그 결과 그들이 지녔던 하늘나라의 열쇠가 시몬 베드로에게로 넘어갔다. 13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리스도교계 예언자, 학자, 율사들을 박해하고 처형한 사실 곧 그리스도 신앙을 이단시해서 배척한 사실을 뜻하겠다.

 

14

14절은 극히 일부 사본에만 있는 것으로 후대 필경사들이 마르 12.40을 이 자리에 삽입한 것에 불과하다.

 

15

15절 둘째 불행선언은 마태오복음에만 있다. 기원전 1세기에 이집트에서 쓰인 요셉과 이세낫, 소설. 58년경 바오로가 고린토에서 쓴 로마서 2,19-20;유스티누스 교부가 155년경에 지필한 트리폰과의 대화,124.4;122.1을 보면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유다교로 개종시키려고 활발히 전도했다.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율법을 다 지키면 정식으로 유다교인이 된다, 만일 할 례를 받지 않고 일부 율법만 지키면 반쪽 유다교인이 되었는데 이런 이들을 일컬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랑이라고 불렀다. “지옥의 아들나라의 아들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16

셋째 불행선언도 마태오복음에만 있다. 예수님 자신은 셋째 자체를 금하셨다. 그런데 우리 단락에선 절대로 맹세하지 말락 하지 않고, 맹세에 대한 오해만 바로잡는다. 곧 맹새해 놓고도 그것은 맹세 행위가 아니라고 해석하는 유다교 율사들의 곡해를 규탄한다. 누가 성전 또는 제단을 증인으로 삼아 맹세하면 그것은 맹세가 아니라고 유다교 율사들은 해석하지만, 성전 또는 제단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우회적 표현이므로 당연히 맹세가 성립된다는 것이 16,22절의 논지다. 바꾸어 말하면 성전 또는 제단을 두고 한 맹세도 존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셋째 불행선언에선 맹세 성립 여부를 논한다. 곧 결의론을 전개한다. 이는 예수님의 지침과는 거리가 멀다. 셋째 불행선언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의 관행을 반영한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맹세 절대 금지령을 완화하여 곧잘 맹세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철저한 지침들을 완화한 사례들은 5.32;19.9;23.2-3에서도 발견된다.

어록에서 따온 표현.(15.14-루카6.39)에서 따온 표현, 로마 2.19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성전의 금은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안에 있던 황금 촛대. 지성소에 안치된 계약함을 덮은 황금 속죄판 등을 생각할 수 있다.

 

22

5.34에서 빌린 표현.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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