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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23주일 / 조재형가브리엘 신부님
작성자신희상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7 조회수607 추천수2 반대(0) 신고


 

연중 23주일 / 조재형가브리엘 시흥5동성당 주임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9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한국교회는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지내면서, 순교자들의 신앙과 열정을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순교자의 열정을 이어가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봉성체 다닐 때, 봉사자는 늘 제가 편하도록 신발을 정리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다니니까, 신발을 신기위해서 손을 대지 않아도 되도록 수고 해 주십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안쪽으로 들어가고 몇 층을 가는지 물으면서 층 번호를 눌러주는 분도 있습니다. 차를 탈 때, 먼저 타기 보다는 나중에 타는 분을 위해서 문을 열어주고 타고 난 다음에 닫아 주는 분도 있습니다. 은행에서도 다른 사람이 들어오려고 하면 문을 열어주고 들어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분도 있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바로 그런 배려가 순교자의 열정을 삶 속에서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서 그냥 나오는 분도 있습니다. 머 그렇게 자랑할 것도 아닌데 남겨 두고 나오는 경우도 있고요.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얌체처럼 새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운전을 할 때면 이런 예의 없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러면 하루가 마음 상하게 됩니다.

저의 동창신부님 중에서 한 분이 일신상의 이유로 잠시 강원도 태백에서 휴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바쁘기도 했지만, 그 동창신부가 왜 휴양을 했는지, 또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큰 관심도 없었습니다. 다만 소문을 들으면서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 못했나보다, 또는 타협하기보다는 부딪치는 불같은 성격 때문에 그렇게 되었나보다 하면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동창신부님들 중에서 2분이 그 먼 태백까지 찾아갔었습니다. 가는 길, 오는 길 무척 힘이 들었지만 휴양 중에 있는 동창 신부님을 만나고 오는 발걸음은 참 가벼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동창신부와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고 합니다. 휴양 중에 있던 동창신부님은 서운한 모든 것들이 봄에 눈이 녹듯이 다 녹았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님이 고마워했던 것은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이였고, 멀리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다른 동창들이 있다는 것 이였습니다.

지금도 몇몇 동창들은 휴양을 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이런저런 이유로 휴양을 하는 동창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고 지나가곤 합니다. 그러나 꼭 한 친구는 휴양을 하는 친구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병원은 어디로 다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친구도 바쁘고, 힘든 일이 많은데 휴양하는 친구들의 연락처, 요즘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선배신부님의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아직은 젊으신 편인데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명동성당으로 장례미사를 다녀오면서 생각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피곤해서 이런 장례미사에 참석하는 신부님들이 점점 적어집니다. 예전에는 아무리 멀어도,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이웃의 아픔과 이웃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는데, 모든 것이 더 풍요로워진 이 시대에 우리는 이웃의 아픔과 이웃의 고통을 함께하는데 더 인색해지는 것은 아닌가!

동양의 성현인 맹자가 제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지금 약손가락이 구부러져서 펴지지 않는다고 하자. 이것이 별로 아프지도 않고, 일을 하는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일 그것을 펴지도록 고쳐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진나라나 초나라같이 먼 곳이라도 기꺼이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손가락 하나가 구부러졌다고 걱정할 줄은 알면서도 자신의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것은 걱정할 줄 모른다. 이것이 무엇이 정말 값진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나 또는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어린 오동나무라도 이것을 잘 키우려고 마음먹으면 그 방법을 알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그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기 몸을 오동나무만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이 더 귀하고 어느 것이 덜 귀한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성서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고, 이웃의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진실한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보초”를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슬기롭게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괭가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성모신심 미사 / 조재형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다음 주가 추석인데 주일이라서 어제 잠깐 집에 다녀왔습니다. 올해 80이신 아버님께서 어머님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하시더군요. 빨래, 밥, 청소, 쓰레기 정리까지 하십니다. 아버님은 1년 하시는데 너무 힘들어 하십니다. 어머님은 몇 년 하셨는지 여쭈어보니, 55년이라고 하시네요. 55년 동안 아버님을 위해서 손이 되어드리고, 발이 되어드리고, 간이고 쓸개까지 다 드렸다고 하십니다. 하긴 저도 어렸을 때, 다 보았으니, 아버님께서 딴 말씀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동두천 떡갈비로 점심을 먹었는데, 두 분이 얼마나 다정스럽게 떡갈비를 드시는지, 제가 부러웠습니다. 어머님을 위한 아버님을 사랑을 볼 수 있었고, 아버님을 위한 어머님의 사랑도 늘 그대로 이었습니다. 어머님께서 동생 수녀가 평화신문에 나왔다고 자랑을 하십니다. 아버님께서는 동생수녀가 평화신문에 나왔는지도 모르십니다.

작은 아버님께서 아버님께 모진 이야기를 하십니다. 형님이 형수님보다 먼저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버님도 예전 같으면 한 말씀 하실 터인데, ‘그래 내가 먼저 가야지.’ 하십니다. 삶과 죽음이 그냥 옆집 놀러가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그리 큰 여행도 아닌데, 우리는 그 거리에 참 많은 것들을 만들기도 합니다.

성모님께 대해서 우리 교회는 많은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성모님은 평생 동정녀이셨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
성모님은 승천하셨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시다.

신학교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해서 마리아론이라는 이름으로 1년을 배웠습니다. 성모님을 신학의 ‘틀’에 가두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실 성모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이 땅에 많은 어머니들은 지금도 숨 죽여 지내고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은 지금도 기러기 아빠, 기러기 엄마가 되어 생이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은 지금도 자신의 온 몸을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이 땅의 그런 어머님들과 함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래도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께 순명을 드리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광과 영예는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그저 당신을 찬양하고 찬송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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