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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월 11일 야곱의 우물- 마르 1, 7-11/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1-11 조회수464 추천수3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요한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7-­11)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모델하우스에 가 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델하우스를 가 봐야 훗날 자신이 어떤 집에 살게 될지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를 분양하는 건설회사가 아파트를 짓기에 앞서 먼저 모델하우스를 지어 분양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건설회사가 앞으로 어떤 형태의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는지 알려주려는 것입니다. 모델하우스는 실체를 보여주는 역할은 하지만 그 실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델하우스의 역할은 아파트를 분양할 때까지입니다. 분양이 끝나고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면 모델하우스는 대개 철거하게 됩니다. 모델하우스의 기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모델하우스의 기능은 실체를 증거하는 역할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마치 모델하우스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이 구원의 새날을 여는 태양의 떠오름과 같다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새날을 위해 저물어 가는 달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식적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추종하는 무리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런 세례자 요한의 영향력을 보면 나자렛 출신 목수의 아들은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며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사명은 백성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예수님을 높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인 동시에 신약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입니다.”(루카 16,16) 세례자 요한의 출현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에 의해 선포된 예언의 실현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말라 3,1) 세례자 요한은 예수에 대하여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고,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고,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마르 1,7­8 참조)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은 자신과 예수님을 대비시키면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신을 낮추십니다.

 
예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으로 오신 것은 고향을 떠나 공생활을 위하여 메시아로서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습니다.(루카 3,23) 예수님의 29세 때와 30세 때는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성경을 살펴봐도 예수님의 29세 때까지 기적과 능력과 말씀 등은 감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30세가 되면서부터 지상에서 볼 수 없었던 초자연적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는 세례자 요한이 잡힌 것이 분기점이 되어 그로 인해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통해 행복한 가정과 안정된 일(목수)과 친구들과의 우정 등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세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소명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러한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자렛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나자렛에서 지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세상 죄의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세례는 죄인들이나 받는 예식이기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 진흙창과도 같이 죄투성이인 사람들의 세상에 들어오셔서 함께 ‘진흙투성이’가 되시겠다는 참된 사랑과 연대의 강력한 표현입니다. 참된 사랑은 단순히 외부에서 도움의 손길만 뻗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처지가 되어 함께 고통 받는 것을 뜻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기적이고 세상 욕심에 사로잡혀 흙탕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런 흙탕물과 같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요르단 강물에 몸을 담그겠다는 것이 아니라 흙탕물과 같이 더럽고 추악한 우리 몸 안에 깨끗한 예수님이 몸을 담그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살면서 우리를 맑고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례자 요한한테 세례를 받은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매우 중대한 결단을 하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그분의 삶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나가는 새로운 삶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습니다.”(마르 1,10) 이 사건은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증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영이 그분 몸과 마음, 인생 전체를 차지하시고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오신 것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인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대로 그 이끄심대로 공생활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에게 확실하고도 잊지 못할 사명이 부여되는 경험을 갖게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라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의 공생활을 격려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하느님의 뜻이었고 그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곧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령 속에 불타올랐던 열정은 인간을 죄와 악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사랑을 택한 사람이 기꺼이 함께 택하게 되는 연대와 연민의 길, 곧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가게 됩니다. 담담히,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느님께서는 마음에 들어 하십니다.

우리 역시 같은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오늘도 내 몸과 마음을 통하여 같은 길을 걸으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 드립시다. 이것이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바일 것입니다.
정애경 수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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