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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환갑 해에 가장 많이 만나는 신부님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29 조회수901 추천수0 반대(0) 신고
            내 환갑 해에 가장 많이 만나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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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매주 타본당 신부님들을 뵙다 보니, 내게는 한 번 뵙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자주 뵙는 신부님도 계시다는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거의 매일 뵙는 우리 본당 신부님 외로 내가 자주, 벌써 여러 번 뵈었고 앞으로도 종종 뵙게 될 신부님을 두고 있다는 것 역시 특별한 일이고 기쁜 일이다.

천안 성거산성지 담당 사제이신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을 나는 올해 벌써 네 번이나 뵈었는데, 앞으로도 두세 번은 더 뵙게 될 것 같다. 정 신부님은 <대전가톨릭문우회>를 비롯하여 미술과 사진 등 대전교구 신자 예술문화 단체들의 담당 사제이시기도 한데, 직접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는 다재다능하신 분이다. 그리고 성거산성지를 온통 야생화 세상으로 만들어놓으실 정도로 야생화에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지니신 분이기도 하다.

정 신부님은 지난 4월 13일 태안성당을 찾아주셨다. 내 회갑기념 신앙문집 3권 출판기념회 자리에 오신 것이다. 그 날 정 신부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21년 전인 1987년 1월 10일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그 날은 우리 부부의 결혼식 날이었다. 혼인미사가 진행될 때, 신자들의 영성체 행렬 속에 신부님이 계신 것이었다.


▲ 축하 떡 자르기 / 회갑기념 신앙문집 3권 출판기념회 자리에는 천안 성거산성지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도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키가 작으셔서 옆 사람에게 가려진 모습이다.  
ⓒ 지요하  신앙문집

당시 서산 운산성당 주임으로 계시면서 내 결혼식 자리에 오셔서 축하를 해주셨던 정 신부님은 그로부터 21년 후 내 회갑연을 겸한 출판기념회 자리에도 오셔서 축하를 해주신 것이다.

그런 정 신부님은 올해 '은경(銀慶)'을 맞으셨다. 천주교에서는 사제 수품 25주년이 되는 해를 은경이라 부르고 '은경축(銀慶祝)' 행사를 갖는다. 사제 수품 50주년이 되는 해는 '금경(金慶)'이라 부르는데, '금경축(金慶祝)' 행사를 갖는 사제들은 많지 않다.

은경축과 금경축 행사는 대개 해당 사제의 '영명축일'이나 바로 전 주일에 갖게 되는데, 온 신앙공동체의 큰 잔칫날이 된다. 육신을 버리고 육신의 생일도 버린 사제들의 영명(靈名/세례명)축일이 본당이나 담당 단체 등 해당 신앙공동체의 잔칫날이라면, 은경축이나 금경축은 광범위한 형태로 축하 행사를 갖게 된다.

그런데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은 현재 본당에 있지 않고 천안 성거산성지 담당 사제로 계시기 때문에 성거산 숲 속에서 은경축 행사를 가졌다. 전에 주임으로 계셨던 근처 입장성당  신자들이 수고를 많이 하는 것 같았고, 신부님이 담당하시는 교구내 여러 예술문화단체 회원들과 천안지구 각 본당 신부님들과 동창 신부님들이 대거 참석해서 행사는 풍성한 모습이었다.


▲ 감사미사 후 축하식 자리에서 화환을 받고 /  5월 10일 천안 성거산성지 산 속에서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의 '은경축' 감사미사와 축하식 행사가 열렸다. 제대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은 미사 후 제의를 벗은 신부님들의 모습이다.  
ⓒ 지요하  은경축

천주교 사제들은 자신을 신학교로 보내주신 신부님을 '아버지 신부님'으로 부르는데, 정 신부님의 아버지 신부님은 은퇴 사제이신 이계창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으로 당연히 참석을 하셔서 덕분에 나도 오랜만에 이 신부님을 뵐 수 있었다.

(이 신부님은 정의구현사제단의 초창기 멤버이셨던 분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28일)이 마침 '아우구스티노 축일'이어서 아침에 신부님께 영명축일 축하 전화를 드렸다.)

나는 정 신부님 은경축 행사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딸도 내려오게 했다. 그리고 감사미사에 참례하고 축하식 행사에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정 신부님이 성당이나 어떤 건물이 아닌 야외에서, 더구나 깊은 산 속에서 은경축 행사를 갖는 최초 유일의 사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오늘은 성거산 산 속에 천주교 사제들이 가장 많이 모인 날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축하식 자리에서 축시 낭송을 했다. 내가 지은 축시를 직접 낭송을 한 것이다. 다소 긴 시여서 여기에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시가 길어도 당신이 낭송을 하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에 힘입어 자못 '멋지게 감동적으로(?)' 낭송을 했다.


▲ 은경 축시 낭송 /  처음 사제의 은경 축시를 지어 행사장에서 직접 낭송하는 영광을 안았다. 축시를 낭송하기 전 "애써 지은 시를 줄이고 또 줄여서 간신히 A4 용지 석 장으로 만들었다"는 말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웃었다.  
ⓒ 지요하  은경축

나로서는 처음으로 지은 사제 은경 축시였고, 처음으로 해본 은경 축시 낭송이었다. 사제의 영명축일 축하식에서 축사를 하거나 축시를 낭송한 적들은 있지만, 은경 축시를 지은 일과 낭송을 한 일은 정말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정 신부님은 내가 천안 순천향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두 번이나 병실을 찾아주셨다. 내게 책 선물도 해주시고, 내가 서울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가던 날은 '봉성체'도 영해 주셨다.

그런 정 신부님을 지난 15∼16일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산골에서 가진 <대전가톨릭문우회> 하계 피정 때 다시 뵈었다. 이틀을 신부님과 함께 하면서, 신부님을 보는 어느 순간, 내가 환갑 해인 올해 우리 본당 신부님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뵙는 신부님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내가 그런 신부님을 두고 산다는 사실이 문득 행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2>

올해 안으로 정 신부님을 최소한 두 번은 더 뵐 것 같다. 9월 20일(토) 대전 '평송수련원' 전시실에서 열리는 '대전교구 설정 60주년기념 연합전시회(시화·미술·사진전)' 개막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고, 10월 25일(토) 대전 궁동성당에서 갖게 되는 <대전가톨릭문우회> 총회 및 작품집 제15호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할 예정이므로….

정지풍 신부님과의 인연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정 신부님은 서산 운산성당에 계셨고, 초임 성당이었다. 관할 지역인 인근 음암면에 음암중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젊은 여교사가 있었다. 홍성군 갈산고등학교에 근무하다가 음악중학교로 자리를 옮긴 교사인데, 도교육위원회와 군교육청으로부터 감시를 받는 처지였다.

전교조는 물론이고 '교단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다. 교육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혐의로 그 교사는 교직을 잃을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서산 지역사회의 시민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일종의 구명 운동에 나섰다.  

그 운동에는 당시 해미성당 주임이셨던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님과 운산성당 정 신부님도 참여했고, 인근 개신교회의 목사님들과 사찰의 스님 한 분도 참여했다. 우리는 그 교사의 교육 내용을 세밀히 파악했고, 학생들의 의견도 들었다. 그리고 교육 관료들의 경직되고 과잉적인 대응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 피정 마무리 인사 / 전가톨릭문우회> 하계 피정(15-16일)을 끝내면서 마무리 말씀을 하시는 담당 사제 정지풍 신부님. 내가 올해 우리 본당 신부님 외로, 가장 많이 만나뵙는 신부님이다.  
ⓒ 지요하  하계 피정

나는 거의 매일같이 운산성당을 갔고, 정 신부님과 함께 한 여름의 뙤약볕 속에서 농촌의 집집과 밭둑들을 다니며 학부모들을 만나 설득했다. 그 교사의 교육 내용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그 교사의 구명을 위한 '학부모 탄원서'에 서명 받는 일을 했다.

길 안내는 정 신부님이 맡았고, 학부모에게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하는 일은 주로 내가 맡았다. 주민들은 대개 정 신부님을 알아보았고, 제법 말솜씨와 사리분별력이 있는 내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하여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런 일도 효력을 발휘해서 그 후 그 여교사는 교직 박탈은 피하고 전근을 가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는데, 22년 전의 그 일을 나는 정 신부님 은경 축시 안에 살짝 언급을 하기도 했다.

정 신부님은 1988년 가을 '추수감사미사'에 나를 초청해서 나로 하여금 주일미사의 강론을 하게 했다. 평신도가 주일미사의 강론대에 선다는 것은 외람되고도 영광된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종종 '인권주일'이나 '농민주일', '평신도주일' 등에 우리 본당이나 타본당의 강론대에 서고, 지역의 한 장로교회 초청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님 대신 설교를 한 경험도 갖게 되었는데, 1988년 운산성당의 추수감사미사 강론이 나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 은경 감사미사 /  수품 25주년, '은경' 감사미사를 지내며 '축성례'를 거행하는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 신부님들은 제대 아래에서 미사를 지낸 분들을 포함, 20여 분이 참석했고, 신자들은 500명 정도 참석했다. 성거산성지 유사 이래 가장 큰 성황이었다.  
ⓒ 지요하  감사미사

정지풍 아킬레오 신부님은 늦은 나이에 사제가 되신 분이다. 원래는 가족은 물론이고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의과대학을 다녔다. 그러다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사람의 육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기보다는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의과대학 4학년 때 신학교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무도 신앙을 갖지 않았던 부모와 온 가족들의 실망과 상심, 비탄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사가 되는 길을 포기한 것만도 아쉬운 일인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천주교 신부가 되겠다니! 가족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설득 과정에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눈물도 많이 흘려야 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차츰 해소가 되었다. 그리고 가족들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제는 가족 모두 하느님 신앙과 은총 안에서 사제를 배출한 영광도 되새기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기쁘게 추구하며 산다.

이런 정 신부님의 과거 사연도 내가 지어 올린 은경 축시 안에 살짝 언급이 되어 있다.

정 신부님은 37세라는 '고령'으로(그리하여 모든 동기들의 '맏형'같은 처지로)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이태 전에 환갑을 지내셨다. 나보다 훨씬 젊으신 분이, 너무도 선량하고 온화하여 '평화' 그 자체인 듯한 느낌마저 갖게 하는 얼굴인데도 나보다 두 살이나 위이시니, 거기에서도 하느님 품이 느껴지는 듯싶다.

정 신부님은 시골 생활이 좋다고 하신다. 도시보다는 시골에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이 좋아 성거산성지 근무를 자원하신 것 같다. 성거산성지 무수한 '줄무덤' 안의 순교선열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지를 오밀조밀하게 가꾸고 돌보며, 순교선열들의 넋이기도 할 듯싶은 갖가지 수많은 야생화들을 심고 피워내는 삶은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특별한 은총일 것도 같다.

서울대교구의 최근 사제인사에서 참으로 이례적인 '안식년 처분'을 받아 갑자기 떠돌이 신세가 되어 버린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님이 어쩌면 천안 성거산성지로 와서 머물며 순교선열들과 야생화 무리 안에서 위안을 받으실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정지풍 신부님의 성품도, 성거산성지의 공기와 정기도, 성거산 곳곳을 풍요롭게 장식하고 있는 야생화들의 향기도 넉넉하고 드넓은 하느님의 품속일 터이므로….

  
008.08.29 09:57 ⓒ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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