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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9월 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16 조회수851 추천수12 반대(0) 신고
 

9월 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루카 7장 11-17절

 

“울지 마라.”


<생명과 죽음의 교차점, 나인>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기적사화는 하느님의 위로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던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나인(Nain)이란 지명의 뜻은 ‘매력 넘치는’ ‘아름다운’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을 전체가 깊은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갈 길이 창창했던 한 청년이 요절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홀로 남게 된 어머니의 슬픔은 그야말로 ‘가슴 찢어지는’ 슬픔,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천수를 누리다가 편안히 세상을 떠난 어르신들의 장례를 두고 우리는 호상(好喪)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제가 한 영안실을 방문했습니다. 고인을 향해 두 번 절하고, 상주들과 맞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맏상주 손을 잡으면서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고인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랬는데, 분위기가 상심이 큰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상주들도 쌩글쌩글 웃고 있고, 여기 저기 다들 떠들고 있고, 고스톱 치고 있고, 이상하다, 생각 들어서 돌아가신 분 연세를 봤더니 글쎄 99세, 아들 며느리들도 이미 여러 명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의 죽음은 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제 막 인생이 꽃피어나기 시작하던 청년이었습니다. 더구나 외아들이었습니다. 젊어서부터 홀몸이 된 어머니에게 청년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삶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슬픔과 외로움,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늠름하게 커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어머니는 그나마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어머니의 통곡에 나인의 주민들은 밤잠을 설쳤을 것입니다.


   불효중의 불효가 뭔지 아십니까? 부모보다 앞서 세상을 뜨는 일입니다.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입니다.


   채 서른도 안 된 딸을 먼저 보낸 한 자매님을 옆에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제일 힘들어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밥숟가락 뜨는 일이었습니다.


   금쪽같은 자식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나 역시 따라 죽고 싶은데, 그래도 해는 다시 뜨고, 사람들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멀쩡하게 살아갑니다. 무엇보다도 자식은 저리 홀로 먼 길 떠났는데, 나는 아직 이렇게 살아서, 어제와 별 다름없는 일상생활을 계속해 나가야된다는 것이 큰 죄책감으로 다가옵니다.


   자식 앞세웠다는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되기에 밥숟가락을 떠보지만, 그게 소화나 제대로 되겠습니까? 나인성의 과부 마음이 그랬을 것입니다.


   이윽고 장례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과부의 슬픔에 동참하기 위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상여를 뒤따랐습니다.


   과부의 뜨거운 눈물이 아들의 시신 위로 계속 떨어졌습니다. 가슴을 후벼 파는 과부의 울부짖음이 장례행렬에 따라나선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십니다. 그러나 운다고 무슨 해결책이 생기겠습니까? 혹시나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자꾸 아들의 시신을 만져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예수님의 일행이 나인이라는 마을로 들어오다가 장례행렬과 마주쳤습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무리가 마주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생명과 기쁨의 행렬이 시신을 중심으로 한 죽음과 슬픔의 행렬과 마주칩니다.


   생명과 죽음이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마주친 것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통 앞에 시달리고 있는 가련한 과부를 바라보십니다.


   아들을 잃고 더 이상 살아갈 힘을 완전히 상실한 과부, 그 과부가 겪고 있는 그 짙은 슬픔, 한없이 깊은 심연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 과부는 숨만 쉬고 있다뿐이지 사실 아들과 함께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과부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과부의 눈물을 보시고 함께 눈물 흘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던지십니다.“울지 마라.”이어서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휩싸고 있는 죽음의 기운을 물리치십니다.


   뿐만 아니라 외아들의 죽음과 함께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던 과부에게 생명을 되돌려주십니다. 외아들을 살려주심으로서 외아들뿐만 아니라 어머니 과부까지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관자 앞에 이제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과부는 통곡할 필요가 없습니다. 장례행렬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자진 해산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관은 깨트려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기뻐하고 춤추며 고을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통곡의 행렬이 찬미의 행렬로 변화되었습니다. 슬픔의 행렬은 기쁨의 행렬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제대로 한번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제대로 그분의 실체와 대면하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통곡은 찬미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죽음의 씨앗은 생명의 씨앗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그 날 이후로 기후변화, 계절변화에 상관없이 우리의 인생은 날이면 날마다 꽃피는 봄날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과제 중의 과제 한 가지는 바로 ‘제대로 주님 한번 만나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곳이 바로 나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나인의 주민들입니다. 오늘도 이 고을 안에서는 죽음의 행렬이 계속됩니다. 죽음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자살이 줄을 잇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삶에 지쳐 쓰러져갑니다. 수많은 독거노인들, 존재가 그리워 고독에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반생명 행위로 무고한 생명이 죽어갑니다. 잔인한 폭력으로 많은 생명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삶이 숨만 쉬고 있다뿐이지 살아있어도 삶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생명의 행렬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생명의 편에선 예수님 무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만 제대로 만나면 죽음의 행렬조차도 생명의 행렬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죽음의 도시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생명의 행렬인가요? 죽어가는 사람,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 아무런 희망 없이 죽음을 향해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가요?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가톨릭성가 286번 / 순교자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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