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확신과 무지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5 조회수570 추천수3 반대(0) 신고

 영국의 소설가 조이스 캐리(Joyce Cary, 1888-1957)는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은 비극이며 이 세상은 온통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아는 게 적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고 말했다. 이는 특히 종교 분야에서는 사실인 것 같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마치 위조지폐를 돌리는 것과 같은 일종의 사기다. 세상에는 많은 정통 기독교 신자들이 있으며 그들은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그들의 맹목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그들은 쉽게 어떤 것을 ‘확신’해버리기 때문에 바로 불신과 혼돈 속에 빠져 버리곤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만 잡으려 하듯 그들은 자신의 ‘확신’만을 믿으려고 한다. 누구나 어떤 것을 확신하게 되면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게 되고 그냥 탈없이 조용히 살려고만 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 병사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것이다. 우리들도 평소에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인지,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지도 모르고 일을 할 때가 많다. 자신이 가진 ‘확신’이, 자신의 편견 속에서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전혀 따지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질러 버리는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클라이슬러(Fritz Kriesler)가 연주하기 위하여 런던으로 떠나기 전(前)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있어 근처에 있는 독일의 어느 악기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가게 주인이 그가 갖고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고는 그를 의심하였다. 주인이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경찰관 두 명을 데리고 왔다. 그 경찰관들은 “당신이 어찌 클라이슬러의 바이올린을 갖고 있소?”하면서 그를 체포하였다. “내가 프리츠 클라이슬러요.”하고 그가 말하니, “우리들을 속이려 하지 마시오.”하고 경찰관이 말했다. 클라이슬러가 잠시 생각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연주를 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경찰관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가 연주하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정통 기독교신자들은 진리의 길을 몸소 걸어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불확실한 것은 두렵기만 하여 옳지 않은 것도 진리라고 믿는다. 자기기만(自己欺瞞)이다. “만약 확신으로 일을 시작하면, 의심으로 끝나게 되지만 의심으로 시작하게 되면 확신으로 끝나게 된다.”고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추종자들이 오히려 하느님을 더 모른다고 깨어놓고 말씀하셨다. 이는 스스로 “예언자들의 상속자들” “계약의 상속자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질타하는 말씀이었다. 통상 우리들이 어떤 사물을 아는 방법으로는 하느님을 알 수가 없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때때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반대 같이 보이는 것을 진실로 아는 이상한 앎이다. 14세기의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생각해 보아라. 지적인 겸손은 신학(神學)의 기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의 한계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하였다. “완전히 이해하고 증명하려고 들지 않는다면,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 스스로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은 유용하다.” 그리고 그가 아주 의욕적으로 쓴 다른 글에서는 “이것은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즉 우리들은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에스터 에크하르트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神)을 알고 그 신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신은 이름도 없고 천지만물 위에 있다.” 그러나 냉철한 아퀴나스가 같은 말을 아주 도전적으로 한 것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다(Before Abraham was, I am).”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탈출기 3:14).
 
 “나는 ‘나는 있는 나’다(I AM Who I AM).”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보내셨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내가 있었다”가 아니라 “내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도 내가 있었고 지금도 내가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시간 개념이 없고’ 시간 개념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고 신(神)이었다. 히브리서(13:8)에서도 말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신성(神性)을 명백히 밝히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나이기 때문이다(요한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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