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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예수인가?
작성자이정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8-31 조회수4,272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는 BC4년경 유다 왕국(후에 통일을 이루고 이스라엘이 됨)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고, 북쪽 지방인 나자렛에서 자랐다. 학력은 무학, 직업은 목수, 특기는 세상 뒤집기. 33세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죄목은 군중 선동, 십자가에 매달린 사진을 보면 얇은 천으로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발가벗긴 채로 군중들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당시 유다에는 유다교(구약 성경만 정경으로 인정)가 지배적이었는데, 어느 날 미치광이 같은 한 청년이 나타나서 하느님과 나는 하나이다.” 즉 그가 하느님이라고 떠들고 다니자 유다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하느님을 모독하고 다니는 그를 죽이기로 내심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군중들은 자기 나라를 로마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시킬 왕이 왕림하였다며 예수를 열광하였다. 그가 야외 연설이라도 하는 날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식사 때가 되자 예수는 물고기 다섯 마리와 보리 빵 두 개로 남자만 5,000명이 모인 군중을 다 먹이고도 남은 빵 부서러기가 12 광주리가 되었다는 빵의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당대에 인정되어 내려온 전통과 사상을 모조리 전복시키며 가난한 이들에게 행복을, 부유한 이들에게는 불행하다고 선언하였다. 이를테면 그는 세상을 뒤집어 놓은 혁명가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알 수 없는 말도 하였다. 결국 그가 미치광이라고 소문이 났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친척들은 그를 붙잡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예수가 머무는 곳으로 가서 예수를 만나려고 하였다. 입구에서 예수의 제자가 스승인 예수에게 그의 어머니가 도착했음을 알렸는데, 예수는 태연스럽게, “누가 내 어머니냐?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다.”며 불량배 같은 말을 한다. 어머니에게 불효막심한 말같다. 그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갓 서른살 정도 된 팔팔한 청년의 나이인데, 성경에는 50세쯤 되보이는 늙은이로 기록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라면 이런 내용을 모르는 사람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생애와 기적을 일으키는 행적을 아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그가 나에게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어떤 관계가 있는 인물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일러주고 있다. (요한17,3)  

 

예수는 우리 인간의 아버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의 예수는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 성경의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예수가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자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겨주셨고(그분의 몸 안은 예수 성심으로 이해된다), 예수의 몸 안에서 그분의 피로 속량 곧 죄를 면제받게 해주셨다는 사실이다. (콜로1,13-14참조) 따라서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태어날 모든 영혼들이 예수의 몸 안에서 살면서 예수의 피로 죄를 면제받은 것이다. (1코린1,30. 에페1,7) 이것이 속량 즉 구속(redemption)의 메커니즘이다. 예수의 피로 죄를 면제받았다는 말을, 제발, 십자가에서 그분이 흘린 피로 죄의 몆제를 받았다고 단정하지 말기를 바란다.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 사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인간의 죄가 면제된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 즉 그분의 죽음은 예수가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킨 화목 제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속죄는 예수의 몸 안에서 예수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즉 우리 인간의 원죄(원조 아담이 하느님께 불순종의 죄)와 본죄(예수 탄생 이전까지 인간들이 지은 죄)는 예수의 몸 안에서 예수의 피가 뿌려져 면제받았다. 원죄는 그래서 그때 없어진 것이다. 그러니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유전되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의 출생은, 따라서, 또 하나의 죄인이 태어나는 저주가 아니고, 죄없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축복이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어휘를 발견하게 되는데, 죄의 면제 라는 개념이다. 성경에서 죄의 면제죄의 용서와는 구분된다. 어떻게 다른가? 죄의 용서(forgiveness of sins)는 죄에 대해 벌을 묻지 않음으로써 죄를 덮어두는 것이고, 반면에 죄의 면제(remission of sins)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힘(power)을 제거하고, 처단하고 씻어준 신비를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 '죄의 용서'는 있었으나, '죄의 면제'는 없었다. 구약 시대 동물의 피를 지성소의 속죄판에 뿌린 대속죄일(Yom Kippur)의 예식은 죄를  없앤 것이 아니고 죄를 덮어둔 '죄의 용서' 예식이었다. 구약 성경에서 죄의 용서와 신약 성경의 죄의 면제 피를 통해 이루어졌지만(히브9,18), 죄의 면제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이루신 속량 위업이다.

우리가 속량 즉 구속(redemption)에 대해 왜곡하고 있는 것은 그분의 죽음이 인류를 속량하신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예수에 관한 책을 20권 정도 읽었다. 책 한 권의 쪽수가 보통 500 쪽이다. 그러니 약 10,000쪽 정도 되는 샘인데, 인간의 영혼이 예수의 몸 안으로 옮겨져 예수 안에서 속량되었다는 진리를 제대로 증언하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속량의 메커니즘을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만 귀속하고 있다. 그런데 속량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예수의 몸 안에서의 이루신 속량 원리를 간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예수 안에서 죄의 면제 신비의 핵심은 예수와 인간이 서로 격리된 상태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몸 안에서 예수와 인간이 영적으로 결합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는데, 이 사실을 모르거나 간과한 이유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인간 속량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속량의 메커니즘은 이중적이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예수의 몸 안에서 예수의 피로 속량된 것이다. 

신약 성경 특히 바오로의 서간문들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160회정도 나온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이 의미없이 기록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 되었다. (콜로1,15-16) 그리고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피라는 말이 32회 정도 나온다. 이 중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미하는 피는 9회 정도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그분의 죽음과 동일시되지만,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뿌려진 피는 그분의 죽음과는 연결고리가 없고(히브10,22ㄴ; 에페1,7), 그분이 살아있을 때 그분의 몸 안에서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예수 안으로 옮겨져 살고 있던 인간의 영혼에 뿌려진 피를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살고 있었음을 확증해 주는 말이다. (1코린1,30) 예수의 몸 안에서 이루신 죄의 면제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자.

 

(1) 로마8,3: “... 그 육안에서 죄를 처단하셨다.” (2) 로마3,24 : “..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3) 1코린1,30 : “하느님은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게 해 주셨다.....그리스도는 우리에게...거룩함과 속량이 되셨다.” (4) 2코린5,17 :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5) 에페1,7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면제(remission)를 받았습니다.” (6) 에페1,10 :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한데 모으는 계획이다.” (7) 콜로1,13-14 :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 나라로 옮겨 주시고...그 아드님 안에서 속량을 곧 죄의 면제(remission)를 받습니다.” (8) 히브10,22 :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깨끗해 졌으며...”

 

예시한 성경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속량 즉 죄의 면제가 이루어졌음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죄의 면제는 인간과 예수가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이룬 것이 아니고, 인간의 영혼이 예수의 몸 안으로 옮겨져(콜로1,13-14) 인간과 예수가 영적 결합을 이룬 상태에서,  그분의 피로 죄를 면제 받은 메커니즘이다.  하느님의 속량 계획은 먼저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인간을 선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정하시고(에페1,4-5), 당신의 선의(善意)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피로 속량, 죄를 면제하시는 계획인 인간 구속 계획을 세우신 이후에,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한데 모으는 것이었다. (이사8,18; 에페1,10; 히브2,13) ‘머리로 한데 모으다.’는 말은 라틴어로 recapitulare 라고 하는데, ‘재창조, 총괄 갱신의 뜻이다. 즉 인간은 예수의 몸 안에서 예수의 피로 재창조 된(regenerated) 것이다. (갈라6,15) 개신교에서는 중생이라고도 부른다. 예수가 강생하자 하느님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죄판을 내세우시고(로마3,25), 인간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겨주신 다음에, 속죄판에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히브10,22), 인간의 죄와 고통을 씻어주시고, 속량하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셨다. (1코린1,30; 에페1,7) 그리고 인간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살고 있었음으로(1코린12,27),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 것이다. 반면에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의 원수 관계를 청산하고, 하느님의 진노를 풀어드림으로써 인간과 화해시킨 화목 제물이 되었다. (로마5,10; 콜로1,21-22; 1요한2,2; 4,10) 죄를 사하기 위해서는 죄인인 인간에게 예수의 피가 뿌려져 닿아야 하는데 (탈출24,8; 레위17,11참조) , 십자가에서 예수가 흘린 피로는 전 인간에게 직접 닿을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예수가 전 인류의 마음에 피를 뿌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히브10,22) 하느님이 인간의 죄를 면제해 주신 원리는 추상적이거나 상상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행위가 아니다. 피와 '죄의 면제'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십자가에서는 그런 연결고리가 없다. 

서두에 예수가 인간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언제 예수가 우리 인간을 낳았느냐?는 의문에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교황청에서 인쇄허가한 '천상의 책'에서 예수가 루이사 피카레타에게 계시하시어 직접 증언해 주신 내용을 보면(제13권24-7), 예수는 살아있을 때 자신 안에 품고있던 모든 인간의 영혼을 그분이 십자가 죽음 직전에 낳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내가 품고 다니던 모든 영혼을 언제 낳았겠느냐?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쓰디쓴 고통의 그 침상에서 온몸이 뒤틀리는 참혹한 경련 가운데 내 삶의 마지마 순간이었다."라고 증언해 준다. 이어서 "나의 죽음으로 그들은 새로운 삶에 태어났고, 모두가 내 인성의 모든 업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이는 내가 새로운 탄생을 준 것에 그치지 않고 각 사람에게 나의 업적도 전부 내어주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겨고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늘 배은 망덕하여 그리도 엄청난 사랑과 고통으로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를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고 인간다운 서운함을 내비쳤다.  속량의 이중 메커니즘에 대해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면 좀더 살펴보기로 한다 

 

속죄제물과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 강생하여 속죄의 제물(로마3,25)로 그리고 화목 제물(1요한2,2. 4,10)로 봉헌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강생한 첫째 목적은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제물을 원치 않으시고,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께 몸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히브10,5) 즉 자신의 몸을 통해서 인간을 속죄한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밝힌 메시지에 의하면, 자신이 강생한 첫째 목적은 인간 마음에 하느님의 뜻을 심어(에제11,19) 하느님 뜻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토로한 첫 번째 말씀은, “회개하라!” 였다. 이 회개는 악() 자체인 인간의 뜻을 버리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뜻으로 인해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중단되었고, 죄와 죽음이 들어와 하느님 뜻의 나라건설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인간이 잃었던 하느님의 뜻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는 4,000년을 기다리다가 이 땅에 강생하였다. 그러나 일부 이스라엘인들의 무지(無知)와 아집(我執)으로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그분을 배척하여 결국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으니 그리스도의 첫째 목적인 하느님 뜻의 나라 건설은 무위로 돌아갔다. 만약 그분의 첫 번째 목적이 성취되었더라면 참혹한 십자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탄생한 일차 목적인 하느님 뜻의 나라』 건설을 접고 대신에 2차 목적인 구속 사업을 먼저 성취하게 되었다. 그분 강생의 첫째 목적은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청원을 담아 주님의 기도문’를 만들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었고 오늘날 우리가 늘 암송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가 되었다.


이어서 예수가 하느님의 구속 사업을 중재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봉헌되었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해 본다. 그분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으로 인간의 죄를 면제하기 위해 속죄 제물, 그리고 하느님과 이 세상의 화해를 위해 화목 제물로 봉헌되었다. 로마서와 요한 1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로마3,25)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십니다.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십니다.” (1요한2,2)

 

예시한 우리말 성경 두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물로만 번역하고 있지만(개신교 성경에서는 모두 화목 제물로 번역하고 있다.),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 성경을 보면, 로마3,25에는 '속죄'는 헬라어로 λαστήριον(Hilasterion)으로, 1요한2,2에서 화목 제물을 λασμός(Hilasmos)라고 서로 달리 기록하고 있다. 영어 성경도 속죄 제물은 expiation, 화목 제물은 propitiation으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두 어휘를 서로 달리 표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로마3,25 본문의 직역은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믿음을 통하여, 그분의 피로써 (이루어진) 속죄로 내세우셨습니다.”는 뜻인데, 여기서 속죄는 헬라어 성경에 속죄판(Hilasterion)을 의미한다. 즉 이 본문의 속죄 제물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분의 피로 인간의 죄를 면제하신 메커니즘을 증언하고  있다. 반면에 1요한2,2 4,10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원하여 봉헌한 화목 제사에 대한 기록이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들이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진노를 풀어드리고 하느님과 인간을 화해시키신 화목 제사라는 뜻이다. 롱맨 영영 사전에 ‘propitiation’‘appeasement’(유화, 완화)의 뜻이 있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속죄 제물인 ‘expiation’은 하느님의 진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는 하느님의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분의 피로 인간의 죄를 면제해 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속죄의 제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속죄의 제물화목 제물로 서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죄를 면제하신 메커니즘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내세우신 속죄판이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죄판을 내세우시고(로마3,25), 그분의 몸 안으로 우리 인간의 영혼을 옮겨주셨고(콜로1,13), 그런 다음 속죄판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우리 모두의 죄와 죽음과 고통을 깨끗이 없애주셨다. (에페1,7; 히브10,22) 또한 예수의 몸 안에 속죄판을 내 세우신 의미는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그 속죄판에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하셨다는 의미이다. 즉 구약에서 하느님의 거처는 계약궤의 뚜껑인 속죄판 위였다. (탈출25,10-22) 하느님이 예수의 몸 안에 거처하면서 인간의 죄를 면제해 주신 장소도 예수안에 내세우신 속죄판이다. (로마3,25) 속죄판은 영어로 Mercy Seat, 한자로는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뜻으로 시은좌(施恩座) 라고 한다. 또 헬라어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표현하면서 1요한2,2에는 ‘ἱλασμός(hilasmos), 1요한4,10에는 ‘ἱλασμν(hilasmon)’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들 헬라어에 해당하는 영어는 ‘propitiation’, 화목 제물이라는 의미다. 같은 성경 안에서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화목 제물로 달리 표기하고 있는 것은 인간 죄의 면제와 죄의 용서에 대한 메커니즘이 같지 않음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를 처단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인간을 옮겨주시어 그분의 피로 인간의 죄를 제거해 주신 것이다. (콜로1,13-14; 로마8,3; 1코린1,30; 로마3,23-26; 2코린5,21) 그런데 성경의 기록과는 반대로 개신교에서는 예수가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와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주장을 하고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칼빈의 구원론과 교회론, 23쪽 참조) 이와 같이 죄의 면제는 그리스도가 살아계실 때, 그분의 몸 안에서 이루셨다. 2코린5,21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죄로 맏드시다.’라는 의미는, 주석 성경에 의하면, 세가 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하느님께서 제물로 삼으셨다는 의미이다. 둘째 추상명사()가 구체명사(죄인) 대신에 쓰였다. 셋째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죄스러운 인류와 동일시되었다는 뜻이다. (로마8,3; 갈라3,13) 그리고 하느님의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의로움 곧 인간을 의롭게 받아들이시어 구속으로 향하게 해주신 것으로 이해된다. 죄는 그렇게 면제해 주셨다면 그 죄에 상응하는 벌은 인간이 죄를 지어 죽을 운명이 되었으나(로마6,23), 예수 그리스도가 자원하여 대속하심으로써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 받아야 할 형벌을 용서해 주시고, 동시에 하느님의 진노를 풀어드렸으며,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다. (1요한2,2; 로마5,1; 콜로1,20)

 

예수의 십자가 죽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었다. (2코린5,17) 재창조는 우리가 원조 아담과 함께 지은 원죄와 본죄를 면제받고 새롭게 변화되어 죄가 없는 새 인간이 되었음을 뜻한다. (갈라6,15)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분의 피를 통해서 우리가 지은 죄를 없애 주셨는데, 그것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남은 문제는 죄의 삯(로마6,23)인 벌을 해결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자원하여 그 벌을 대신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느님은 인간과의 원수 관계를 끝내시고 화해하셨다. (로마5,10) 즉 십자가 사건으로 하느님은 인간에게 내리실 형벌을 용서해 주셔서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위업이 하느님의 벌의 용서’이다. 그런데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은 죄의 용서와 벌의 용서를 달리 베푸셨다. (탈출34,7)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속죄를 위해 인간의 영혼에 뿌려진 피와,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바치신 피(즉 그분의 죽음)를 구분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피라는 말만 나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분의 죽음으로만 해석하는 성경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음의 두 성경 본문을 비교해 보자.

 

그러나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에페2,13)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위의 두 성경 본문에서 첫 번째 구절인 에페소서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피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죄를 처단한 그리스도의 피를 말한다. 앞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내세우신 속죄판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로마3,25) 즉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옮겨져(콜로1,13-14), 그분과 영적으로 결합되었고, 그분의 피가 속죄판에 뿌려져 우리의 죄가 면제된 원리로, 그때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는 십자가 죽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만약에 예수의 피가 그분의 죽음만을 의미한다면, 예페2,13에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 졌다.'라는 말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다.'는 의미가 되어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예문인 콜로새서에서 십자가의 피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 - 즉 그분의 죽음 - 는 하느님과 만물을 화해시킨 화목 제사의 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인간을 속량하신 메커니즘은 이중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하신 죄의 면제’(로마3,24-26; 히브10,22)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루신 속량 즉 벌의 용서’(1요한2,2; 4,10)와 동시에 이루신 죄의 용서’(히브9,28)가 그것이다. 따라서 죄의 용서와 죄의 면제는 그 메커니즘과 시기가 다르다. 죄의 면제는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어 인성이 형성되자 하느님이 인간의 영혼을 그분께 옮겨주신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에서 죽기 전까지 지속되었고, 반면에 죄의 용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으로 하느님께 보속을 바침으로써 이루신 신비이다.

 

(속량과 관련하여 심도있는 내용이 필요하시면 글쓴이가 지은, 죄와 벌 그리고 용서(교보문고)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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