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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러운 영, 악령을 쫓아내려면?
작성자유웅열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4 조회수612 추천수7 반대(0) 신고
 

더러운 영, 악령을 쫓아내려면?

(구마사이신 예수님)


“그 때 마침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이 회당에 있다가

외쳤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를 없애러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마르 1, 22-24)


예수님이 하느님께 대한 말씀을 하시면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감동해서 그냥 가볍게 받아넘길 수가 없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람의 몸에서 더러운 영을 끌어냈으며 그분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 정체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더러운 영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어지럽히고

자아의 모습을 더럽혀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한다. 억압된 열정과 욕구로 혼탁해진 안경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바르게 봐야 한다는 자극을 받지만 그것을 거부한다.

올바로 보면 마음 편하지 않고 지금 편히 누리고 있는 안정감이

흐트러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더러운 영은 강박, 고정관념, 콤플랙스,

감정의 혼란과 차단, 명석한 사고력의 결여, 내면 분열상태 등이다.


어떤 경우에 하느님에 대한 말만해도 대뜸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 사람 속에 있는

더러운 영이 말을 했을 것이다. 더러운 영은 말하자면 억압된 공격성,

무의식적 증오감, 맺힌 한과 불안인 것이다.


예수님은 더러운 영과 말씨름하면서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명령을 내리셨다: “잠자코 떠나가라”(마르 1,25)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내쫓아 버리셨다.

그리고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던 남자를 구해내시자 그 남자는

다시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더러운 영은 남자를 다시 이리저리 내팽개치다가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도 복종하는 구나.”(마르 1,27)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는 사람은 하느님과 자기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있고 그 말씀을 통해 진정한 삶의 길을 체험하게 된다.


여러분의 생각을 어지럽히는 더러운 영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아의 모습은 올바른 것입니까? 아니면 본래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덮어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위의 사람들을 볼 때 무엇이 여러분의 눈을 어지럽힙니까?

여러분은 어떤 안경을 쓰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무의식의 은신처 속에 숨어 있는 더러운 영을 밖으로

끌어냅니다. 무엇이 여러분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나오게 합니까?

언제 예수께서 여러분을 안절부절못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십니까?

                                          예수님의 50가지 모습.

오늘의 묵상:                              안젤름 그릔 신부 지음. 


더러운 영은 강박, 고정관념, 콤플랙스,

감정의 혼란과 차단, 명석한 사고력의 결여, 내면 분열상태 등이다.


사람은 불완전하다. 실로 실감나는 말이다.

좀 더 자숙하고 좀 더 신중했더라면 그런 짜증을 내지 않았겠지만,

짜증을 낸다는 것도 말하자면 더러운 영이 마음을 쥐어짜고 내면의 분열을

일으켜서 분위기를 흩으러 뜰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만큼 들었다고 생각되지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더러운 영이

한번 마음을 휘졌고 나면 나도 모르게 그 더러운 영의 노예가 됩니다.


기분 좋은 말을 들을 때 마음이 온순해 지고 얼굴에 부드러움을 나타내면서도

자기에게 마음을 긁는 소리를 한다든지 못마땅한 말을 들을 때는 그 평온한 마음이

돌변하여 언성이 높아지고 참을성을 잃어버리고 더러운 영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이럴 때는 참으로 후회스럽고 인간의 허약함에 얼굴을 붉히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솔직한 고백을 읊어 보면서 내 자신의 허물을 달래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7,15-19)


요 며칠 전에,

김 웅열 신부님의 강론 말씀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상당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후회와 회개는 어찌 보면 상당히 비슷한 말로 들리지만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후회는 자기가 한 짓이 잘못임을 알기는 알지만 아는 것으로 끝이고 더 어떻게 할 수

없음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유다가 예수님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기고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4-5)


그러나 회개는 자기가 한 짓이 잘못인줄 알아 통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 26,75)


유다가 죄를 지은 것을 알고 후회하면서 목매달아 죽은 것으로 끝나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한 것이 죄지은 것이라고 회개하면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들어야 하였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듣게 됩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 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고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오늘 우리들이 한 잘못을 회개하면서 주님의 뜻을 살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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