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회칠한 무덤(민중혁명)<과>완전한 가난(사랑혁명)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26 조회수463 추천수3 반대(0) 신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영성적 가르침의 초점을 하느님과의 초자연적 합일에 맞추고 있습니다. “순수 그리스도(게시자: 자기 안에 자기가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게시자: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모시는 것) 외에 다른 영적 진보의 길은 없다" 하느님 사랑이 영혼에게 이끌리는 것은 그 영혼의 절대적인 자아 포기와 깊은 겸손(게시자: 자기 안에 모신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이다. 관상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하느님은 은밀하고 평화롭고 ''내림의 사랑'' (게시자: 은총)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비추심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리라") 으로 얻게 된 비천한 자아 인식의 실상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에 대한 인식이 나오게 된다. [게시자: 자기 비하와 자기 비참에 대한 얽매임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은총)으로 말미암아 영성적 겸손을 얻게 된다.] 영성적 겸손으로 인하여 감성의 오만, 그리고 마침내는 영성의 교만에 딸린 일체의 악습들이 씻겨져서 영성의 길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애덕(사랑)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시자: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 = ''삼위 하느님과의 합일'' / 의로움 / 완전함 / 거룩함 이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모신다면 이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이를 ''그리스도의 이행'' 이라고 부른다. =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2고린토6, 16 참조 ) 은혜를 받는 데에 제일 도움이 되는 것이 '영혼의 순결' (게시자: 영혼의 우상화를 없앰, ''순수 그리스도'')이라고 성인은 대답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와의 합일에 이르기 전까지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는 십자가의 신비 (게시자: 자기 십자가를 짊, 그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의 이행'')를 몸소 체험하며 신앙의 깊이를 다져 가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체험하면서 언어로 표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게시자: 십자가 사랑, 자기 비움, 완전한 가난)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머리에서 떠난적이 결코 없었다. 
 
< 이상 영혼의 깊은 밑바닥 [십자가 성 요한의 영성] 2008-08-21 오전 11:20:27 간략 줄임>
 
"나는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사이를 거닐 것이다." => "거닐다" = 그리스도께서 걸음걸이로 거닐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내) 가운데 내재하시기도 하고 초월하시기도 하며 투과하신다는 뜻입니다. '투과'라는 것은 들어왔다가 나감을 말합니다. 머무르심과 가깝습니다.
......................................................................................................................................
 
그리스도의 이행, 그리스도(말씀)에게서 성덕의 빛이 오지요. 자신의 '어둔 밤'은 자신의 수덕(삶의 체험)에서 거쳐 지나는 것이지만 먼저 그리스도께서 빠진다면 이 '어둔 밤'은 영혼의 동물적인 탐식과 다를바 없습니다. 자기 안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께 집중함으로써 (순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나 자신(자애심)을 버리게 합니다. 나 자신 안에 사랑(그리스도의 십자가)이 소용돌이 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욕과 맛)들만이 자기 안에 꿈틀거리고 자기 자신만 커져만 가게 됩니다. 자기(자애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비우고자 하는 자신' => 곧, '자기(자아)가 있다' 는 뜻입니다. 어떤 자아인가 ? => '비우고자 하는 자아' 이지요. '비우고자' 하는 자아는 사실 '비우지 못하는' 자아에 묶여 버리고 맙니다. 자기 비움 => '완전한 가난' => '거저 주는 것' 입니다. / 남에게 주는 것이지요. 성인은 우선 우리의 감각적인 것('비우고자 하는 자기')을 영적인 것(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모든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합니다. 욕망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곧, 영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망들에 대해 대항을 행하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성인께서는 신덕(믿음)으로 이성이 정화되고 망덕(희망)으로 기억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애덕(사랑)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셨는데 이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가르침이다고 봅니다. '자기 비움'은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의지가 묶여 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영지)고 묻는 것이 아니라, 거저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되지요.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 가운데'를 거니시지요.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진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 그후 나를 따라라'하신 말씀에서 사랑의 실천은 재물을 '악'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재물에 묶인 자애심)를 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자 하는' 이것도 재물과 다를바 없습니다. '비우고자 하는 자신'은 '비우고자 하는' 것에 묶인 자기의 자애심이지요.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런 자애심이 없는 '순수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억으로 파악될 만큼 형(形)과 상(象)을 지니지 않으시므로 기억이 하느님과 합쳐져 있는 경우에 형도 상도 없고 상상도 없어져서 망덕(그리스도와 일치이다면)으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면 기억은 오직 최고 선(하느님)에 빨려든 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겸손, 순종이라 합니다. 아버지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가 이 의미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만 하신 분이 아니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따름은 실천의 삶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삶이고 삶은 기도가 됩니다.
 
완전한 가난 .........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것' 입니다. 완전한 자기 버림 = 자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기를 주는 것. 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히 '자기를 내어 주심'입니다. 성체를 먹으라는 하신 것은 이런 완전한 가난, 거저 주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없는 것이 가난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기 없슴을 비움이라 하지 않고, 거저 주는 가난함, 거저 자기를 내어 주는 비움이 완전한 [ 가난, 비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훈훈한 성탄-
 
작성자   허윤석(drhur)  쪽지 번  호   32479
 
작성일   2007-12-25 오전 8:38:13 조회수   398 추천수   10
 
전 올 겨울 대림시기 동안 한동안 우울하였습니다.

빈부의 격차, 삭막해 지는 사회 분위기, 갈수록 사라지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과 냉대, 그리고 이기주의!

과연 크리스 마스는 지금 한국의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렸을때의 성탄절을 생각해 보면 사회전반이 가난하고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그랬지만 무엇인가 훈훈한 정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올해 성탄을 맞아 저는 10년동안 저금한  커다란 돼지 저금통33개통에 꽉찬 돼지저통을 열었습니다. 

저금액이 생각보다 꽤큰 액수였습니다.

대림시기에 저금통을 턴 돈으로 고아원과 무의탁 노인들의 쉼터를 몇군데 방문하였습니다.

사제라는 신분은 드러내지 않은체 가서 그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성금과 선물도 전달했습니다.

소박하고 비밀스럽게 보람있고  기쁜 방문이 되길 기대했던 저에게 그분들의 이야기의 삶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이야기와 눈물은 오히려 돌아오는 제마음을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가득했습니다.

 

한국사회의 발전된 모습! 수출이 늘고 해외여행이 늘고 외제차가 많아지고 백화점과 식품점에 넘쳐나는 음식들 매일매일 늘어가는 아파트 공사의 모습안에서 보여지는 모습안에서 저는 정말 많은 착각을 하고있었던 것 입니다.

아직도 배고프고 외롭고 병든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더 힘들어 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매년 그들에 대한 도움과 나눔의 손길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

그러면서 참으로 우리의 기도와 희생과 나눔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고 동시에 참담하고 가난하고 암담한 현실앞에 살아야하는 많은 이웃들의 처지가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지면서 과연 교회인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을까 얼마나 할수있을까? 나같인 작은 도움이 얼마나 도움이나 될까?라는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저보고 종교가 무엇이냐고 어느 할머니가 물으셨습니다.

"천주교입니다. 세자요한입니다. 세례명이!"

"예수님 사촌형이지라! 맞재? 난 엘리사벳이여! 세례자 요한 엄니!"

부탁이 있는니...........

우리 자식 외아들 우리 자식위해 이것 조금씩 봉투붙이는 일 해서 번돈으로 모은  미사예물인데

어디든 성당가서 미사예물 좀 접수해서 미사 넣어줘요

26일이 우리 아들 영명축일인데............

네! 할머니

그런데 놀란것은 다른 할머니 말씀이었습니다.

원래 잘사시던 할머니셨는데 외아들 내외가 80이 넘는 노모를 버리도 도망갔다고........

자기 아들 욕하면 역정내신다고...........

그 할머니 방 작은 거울 앞에는 작은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누워계셨습니다.

자기를 버린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의 구유

그 할머니의 구유 안에서 뭔지 모를 훈훈함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올해 우리 수녀원의 마굿간은 참 아름답고 예쁘게 꾸며졌습니다.

아저씨들의 노고와 본원장 수녀님의 예술적 감각과 추진력으로 저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마굿간이 되었습니다.

외출하다 저녁때 돌아오면서 사회의 썰렁한 성탄절분위기를 보다가 수녀원 사제관으로 돌아오면서 예수님이 탄생할 마굿간을 보니 몇일 전부터 제마음속에 어린 시절 가졌던 훈훈한 성탄 분위기의 마음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땀을 흘려가며 정성스럽게 짚을 이어 예수님의 집을 만드는 솔로몬 아저씨의 작은 눈!

발갛게 달구어진 추위속에서도 열심하신 기관장 아저씨, 그리고 무엇을 느끼는지 관심있게

바라보며 이리저리 서성이며 대화를 나누는 듯한 믿음이와 소망이 부부!

참고로 이들은 멍멍이입니다.

저보다 더 행복한 얼굴이었습니다.

썰렁한 마음을 갖고 있던 저에게 점점 완성되어가는 구유를 바라보는 것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임마누엘!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문구를 저는 잠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저들은 왜 그렇게 가난할까?

그들을 도울 경제적 풍요가 우리와 함께가 더 우선적이다.라고 착각하였던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게 계시다면 저들은 왜 저렇게 병들고 죽어갈까?

그들에게 좋은 치료와 하루빨리 치유되어 건강이 더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하느님보다 돈 , 치유, 풍요, 평안, 등이 더 우선적으로 우리와 함께 함을 기다리지는 않은지?

저는 완성되어가는 가난한 마른 풀로 엮어 정성이라는 손으로 만들어 지는 작은 마굿간을 보면서 머리가 아닌 제 가슴이 훈훈해 짐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가난하고 초라하고 추원 마굿간에 탄생하셨지만

아기예수님이 마굿간 구유에 탄생되어 계심으로써 그 마굿간은 훈훈해 집니다.

훈훈(薰薰)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탄생을 표현하는 분위기가 훈훈한 분위기가 아닐까요?

 

훈훈하다는 말은 훈훈하기 전에 추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훈훈한 이공간 이외에 밖에는 아직 춥다는 말입니다.

훈훈이라는 말은 한문으로 풀초자에 충만할 중 자에 작을 소자에 마음심자 이렇게 4글자로 만들어집니다.

그 어원을 보면 옛날 가난한 이들은 마른 풀을 소나 양처럼 덮고 자는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가난한 이들은 빈곤한 이들과 다른 개념으로 그 마른 풀을 서로 더 가난한 이들의 잠자리에 덮어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더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려는 마음이 충만할 때 그마음은 따뜻해짐을 느낄수 있다고 하여 마른 풀을 서로의이불로 깔고 덮어주고 서로 감사하며 행복한 미소가 흐를때 바로 그 공간과 관계안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한문으로 훈자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잠시 유혹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하느님만으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완성이며 희망의 근거인데 그것을 이유로 전제로 하여 세상의 어둠을 한탄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그런데 왜 세상은 ........ 이라는 토를 달기 위한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성탄은 훈훈함입니다. 성탄은 풍요와 풍유로서의 넘침이기 보다 나눔을 통한 신비의 훈훈함 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외침이 잠시 저에겐 와닿지 않았던 것은

바로 아기예수님의 훈훈한 겸손되고 소박한 사랑과 신비를 깨닫기 보다

사회사업가 혹은 정치개혁가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저 가난하고 보잘것 없게 보이는 마른 풀로 엮은 마굿간 구유에 예수님을 안치시킬때 저는 정말 훈훈한 마음을 동심에서 처럼 다시 탄생됨을 오늘 느꼈습니다.

그리고 사제로서 이미사를 집전하는 저가 80세 넘은 엘리사벳 할머니의 따뜻한 정성어린 미사지향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미사야 말로 그 엘리사벳 할머니의 정성어린 말처럼! " 사람이 나눌수 있는 가장 소중한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미사엔 할머니 말씀대로 "참회와 봉헌과 생명과 나눔과 영생과 희생과 부활과 축복이 있다는 것!"

 

봉투하난 붙이는 데 10원 미사예물은 20000원 2000번 봉투를 붙이면 기도하셨겠죠! 할머니!

부족한 우리 마치 보잘것 없고 마른 풀잎으로 이은 저 마굿간의 멍석과 가축들의 이불처럼

우리의 기도가 지금 이 훈훈한 미사성제의 은총의 열기를 담아내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저는 이 미사성제가 가난한고 어두운 이세상에 얼마나 훈훈한 구원과 생명의 온기가 되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미사는 바로 아기예수님의 사랑방이며 아기예수님의 냄새가 물씬나는 훈훈한 행복 도가니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우리의 훈훈한 기도와 정성어린 마음이

이 세상에 자석적 심혈의 마음을 가져다 주는 성화의 탄생이 되길 바랍니다.

잠시 각자 우리 영혼의 가슴에 귀여운 아기예수님의 훈훈한 사랑의 온기를 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이시간 고통받고 외로운 이들에게도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시다.

 

 ..................................................................

 

 <참고> 위의 파란색과 빨간색은 '사랑의 혁명'을 해석하기 위해 전달하고 싶은 표시입니다. / '개혁가의 마음'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 입니다. '마굿간 구유'와 같은 자신의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의 사랑'이 탄생할 때, 바로 '사랑의 혁명'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사랑의 실천 하나 하나가 "이 세상에 자석적 심혈의 마음을 가져다 주는 성화의 탄생이 되길 바랍니다."하시는 신부님의 소망과 함께 합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