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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의 증언]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9 조회수534 추천수0 반대(0) 신고
부유한 사람들이 ‘참행복’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나누지 않는 삶’자만에 사로잡힌 삶’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것이 많다고 쉽게 나누지는 않습니다. 많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것입니다. 나중에는 명예까지도 욕심냅니다. 소유가 많고 적음은 ‘인간 사회의 구분’일 뿐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분께는 ‘있는 이나 없는 이나’ 똑같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죽을 때에는 두고 가야 합니다. 평범한 이 사실을 외면하면 정말 불행한 사람이 됩니다.  <출처 : 굿뉴스, 수요일 복음, 오늘의 묵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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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에게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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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이행, 그리스도(말씀)에게서 성덕의 빛이 옵니다. 자신의 '어둔 밤'은 자신의 수덕(삶의 체험)에서 거쳐 지나는 것이지만 먼저 그리스도께서 빠진다면 이 '어둔 밤'은 영혼의 동물적인 탐식과 다를바 없습니다. 자기 안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께 집중함으로써 (순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나 자신(자애심)을 버리게 합니다. 나 자신 안에 사랑(그리스도의 십자가)이 소용돌이 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욕과 맛)들만이 자기 안에 꿈틀거리고 자기 자신만 커져만 가게 됩니다. 자기(자애심)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비우고자 하는 자신' => 곧, '자기(자아)가 있다' 는 뜻입니다. 어떤 자아인가 ? => '비우고자 하는 자아' 이지요. '비우고자' 하는 자아는 사실 '비우지 못하는' 자아에 묶여 버리고 맙니다. 자기 비움 => '완전한 가난' => '거저 주는 것' 입니다. / 남에게 주는 것이지요. 성인은 우선 우리의 감각적인 것('비우고자 하는 자기')을 영적인 것(하느님의 은총에서 오는 모든 영적인 것)들에로 집중시킬 것을 권합니다. 욕망들을 끊어버리기 위해서는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본성적인 욕망들에 반대되는 것(곧, 영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함으로써 욕망들에 대해 대항을 행하여야만 한다고 합니다.
 
신덕(믿음)으로 이성이 정화되고 망덕(희망)으로 기억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애덕(사랑)으로 의지가 정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하셨는데 이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가르침이다고 봅니다. '자기 비움'은 욕망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끊어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에 의지가 묶여 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느냐"(영지)고 묻는 것이 아니라, 거저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되지요.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나 가운데'를 거니시지요.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십니다. 단지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진 부자 청년에게 '재물을 나누어주고 그후 나를 따라라'하신 말씀에서 사랑의 실천은 재물을 '악'으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재물에 묶인 자애심)를 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자 하는' 이것도 재물과 다를바 없습니다. '비우고자 하는 자신'은 '비우고자 하는' 것에 묶인 자기의 자애심이지요.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그런 자애심이 없는 '순수 그리스도'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억으로 파악될 만큼 형(形)과 상(象)을 지니지 않으시므로 기억이 하느님과 합쳐져 있는 경우에 형도 상도 없고 상상도 없어져서 망덕(그리스도와 일치이다면)으로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면 기억은 오직 최고 선(하느님)에 빨려든 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런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실지라도 이는 '나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겸손, 순종이라 합니다. 아버지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는 이 의미이다고 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만 하신 분이 아니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따름은 실천의 삶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삶이고 삶은 기도가 됩니다.
 
완전한 가난 ...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것' 입니다. 완전한 자기 버림 = 자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자기를 주는 것. 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완전히 '자기를 내어 주심'입니다. 성체를 먹으라는 하신 것은 이런 완전한 가난, 거저 주는 것을 뜻합니다. 단순히 없는 것이 가난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기 없슴을 비움이라 하지 않고, 거저 주는 가난함, 거저 자기를 내어 주는 비움이 완전한 [ 가난, 비움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가난(사랑혁명) 2008-08-26 오후 9:51:07에서>

'세상의 수치'와 '천상의 수치'는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100 을 전부라고 했을 때에, 세상에서는 99도 전부이다고 말하고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99를 결코 100 이 아니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리의 잃어 버린 양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다수의 99를 보면서 1를 볼 수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님 당신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 여깁니다.

과연 다수를 사랑한다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일까요. 잃어버린 그 한마리의 양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면 그 한마리 양을 찾는 사랑은 인간적인 집착일 뿐일까요. 그 한마리 양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면 남들이 당신을 포기할 때에 남들에게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묻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일꾼으로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수취할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을 도구로 하여 잃어 버린 가장 보잘것 없는 한마리 양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완전하신 뜻을 이루어 내십니다.

사람은 어루만져 보고 그 사랑을 느낍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어루만지며 사랑을 느끼고자 합니다. 이처럼 보잘것 없는 한 사람도 한 영혼으로서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런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런 인간의 존재가 다수 안에서 자신이 가장 나약하여 슬픔에 빠졌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완전하신 뜻에 따라 잃어 버린 양을 찾으러 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 있는 형제(사람들, 대중) 가운데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고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그분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입으로는 주님이라고 불러도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섬기는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100 이 아닌 99 를 전부라고 여기고 1 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고 봅니다.

사실 모두 사랑한다는 말 안에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십자가 사랑은 알고 싶지 않다는 세속적인 내심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 보다 큰 사랑은 없다"라며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 내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99를 보며 1를 업신 여긴다면 그에게는 '하느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세상 계산에 합류하여 빛을 잃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을 올바로 섬기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오늘 복음에서 다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99는 100 이 아니다 2006-12-13 오전 1:25:48에서>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 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바다는 그 한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마더 데레사 어록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능력을 잘 아신다. 그래서 작은 일에 소홀히 하지 않도록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는 그 성심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사람 안(능력 한계)에서'' 생명을 주시는 움직이는 진실한 가르침이시다.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위해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베푸셨다. 주님의 은총을 입은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천대받은 죄인들과 오래된 병자들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과도 같았다. 착한 목자의 성심은 결코 대중 위의 영웅이 되려는 인간의 허영심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랑의 순종  2007-12-25 오후 9:15:35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시지만 한편 근본적인 선택도 요구하신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 (큰 사랑은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 들으려면 그 나라에 들어 가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제자(한 몸)가 되어야 한다. "저 바같"(마르 4:11)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또한 베드로 위에 세운 당신 교회에게 죽음의 세력에 대한 승리를 보장하신다. 교회는 이 신앙을 보호하고, 형제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는 '하늘나라의 열쇠'에 대한 사명을 맡게 된다.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파스카 직전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지상에서 고생하고, 지상에서 봉사하고, 지상에서 멸시받고, 굶주리기 위하여  [그분께서 내려오듯이 우리는 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아래로 내려가라" / 하느님의 나라. 2006-08-02 오후 4:51:47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자비(선)하심을 맛보고, 당신의 원의대로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제 자신의 가진 많은 헛된 것들을 점차로 비워 낼 줄 알며 더 많은 참된 자유를 주님의 은총과 진리 안에서 체험하여야 합니다. 그분을 따르며, 그분과 함께 십자가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또 그분께서 부르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십자가, 거기서는 고통도 슬픔도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며 우리를 괴롭히는 죄와 악에서 마침내 승리하여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러 내린 사랑과 생명의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구원의 생명 강을 따라 계속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언젠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든 충만함을 경험하리라고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신 주 예수님, 당신과 함께 더 깊은 물로 '내려갈 수 있게' 저를 재촉해 주십시오. <십자가 생명은 '내려 가는' 예수의 사랑이다. 2007-03-21 오전 1:48:28에서>

고통을 이기는 것은 '고통의 힘'이 아니다. 고통의 밑바닥에 깊이 있는 '사랑의 힘'이 진정 고통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오체투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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