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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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9 조회수598 추천수0 반대(0) 신고
김택암 신부 등 4명의 사제들은,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대한 서울대교구 주교들의 부정적 시각과 편견에 대하여 고심하던 중, 인천교구의 김병상, 황상근 신부 등과 의견을 나누어 우선 서울교구의 사제들만이라도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을 면담하기로 했다. 교구장 면담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제들의 1차적 사명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같이 하늘나라에 대한 ‘증거와 선포’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있음을 확인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일깨우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 한편 김택암 신부는 교회 안에서 사제단에 대해서 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도둑도, 집안도둑이 더욱 씁쓸하다” 심경을 밝혔다. ... “부끄럽게도 한국 현대사의 큰 역할을 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대해 천주교 주교회의는 늘 견제하고 방해하고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취재: 지금 우리 교회] 2008-09-08 오후 4:45:36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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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화요일 제1독서>
 
 
"하늘나라에 대한 ‘증거와 선포’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있음을 확인하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일깨우기 위함”이었다"<[취재: 지금 우리 교회] 2008-09-08 오후 4:45:36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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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섭신부의 가톨릭 교리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사목직무는 교계제도의 핵심인 주교들이 수행한다. 그러나 교회가 점점 커지고 주교들의 일이 많아지자 주교들은 신부와 부제들을 뽑아 협력자로 참여시켰다.

신부들은 주교가 정해주는 사목구역 안에서 사목하되, 철저히 주교의 사목지침을 따라야 한다. 신부들은 주교에게 매여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신부들은 성품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사목권을 받았다. 그러나 그 사목권을 행사할 때는 주교에게 종속된다. 다시 말해 신부들은 성품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사목권을 주교의 허락과 주교의 뜻에 따라 행사한다. 신부는 자기가 수행하는 사목분야에서 자기의 주교를 대리한다.

이처럼 신부들은 주교의 협력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주교와 함께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점에서는 주교와 신부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차이는 주교는 고유한 사목직무가 있는 반면, 신부들은 주교의 사목직무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신부의 직무는 주교에게 협력해 복음을 선포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직무는 역시 주교의 직무다. 그러나 주교가 교구의 모든 본당과 사목구역을 사목할 수 없기 때문에 신부들을 협력자로 뽑아 어느 특정지역과 분야의 사목 직무를 맡기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가 "인간적 특성과 활동을 과시하려는 모든 것에 교회는 비판적 감각을 지녀야 하며 ... ( 교회가 비판적 감각을 지닐 뿐 아니라, 그리고 신자들이 교회를 향한 )비판 또한 정당한 한계를 지켜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비판은 건설적인 것이 못 되고 우리가 주로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충만히 누려 온 진리와 사랑과 은총을 감사할 줄 모르는 소행이 된다. 그러한 비판은 봉사의 자체가 아닌 ... 타인을 통제하려는...때로는 너무나 무분별하게 횡행한다. <참조, 주교회의 문헌자료, 교황요한바오로2세 문헌, 인간의 구원자>
 
각 개인이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세상은 부조리와 불평등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자기 중심적 (혹은 인간 중심주의) 사고는 정당한 시각이 아니다. 그 근거는 세상의 주인은 '자신(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진리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곧 세상은 하느님의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내 질서에 맞추어 돌아가지 않는다는 자명한 진리가 설파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삶의 해방과 자유가 (정치와의 만남이 아닌)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한 진정한 관계성' (가톨릭의 깊은 보화)에 숨어 있음을 그리고 '하느님과의 만남'이야말로 삶의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근원적 체험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기 위해 사막(광야)으로 갔다. 사막(광야)에서는 사방 어디에서나 늘 똑같은 그림만 보일 뿐이고 정적이다. 그런데도 광할한 사막은 숨을 쉬고 말을 하고 빛을 발한다.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예감이 사막에서는 우리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성을 만난다. 이런 긴장 속에서 자기 안에 있는 사막(광야)을 발견한다.
 
토머스 머턴은 이렇게 말하였다. "사막의 교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다운 자아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교부들은 세상(정치 논리) 속에서 만들어진 자아를 완전히 거부하였다. 그들은 알려져 있지 않은 또한 자유롭게 선택하는 하느님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사람들(세상적)이 앞서 그려놓은 길,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 받은 길(정치적)이 아니었다. 교부들은 다른 사람이 고정시켜 놓은 '주어진 하느님' (귀로만 들어왔던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홀로 발견할 수 있는 하느님을 추구했다"
 
욥에게 있어서도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받고 있으니 세상과 하느님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고발한다. 그러나 하느님과 만남을 통해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만을 앞세운 이기적인 판단이요 오만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온 '귀로만 들어 왔던 분'이었음을 고백한다.
 
'귀로만 들어 왔던 하느님'은 '내'가 아닌 '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직접 체험이 아닌) 체험된 하느님일 뿐 실상 내 실존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존재일 수 있다. 아무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실제의 삶이 행복과 구원으로 충만되지 않는 이유는 그저 남들의 신앙과 화려한 이론에 의해 소문(정치논리)으로만 전달된 하느님을 알고 있을 뿐 자신의 내면에서 체험되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의 시발점으로 삼았지만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정치적인 논리에 입각한 사랑이 아니다) /  <이상, 야곱의 우물에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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