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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관상기도가 명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작성자김은정 쪽지 캡슐 작성일2012-09-23 조회수464 추천수1 반대(0) 신고
나를 찾아가는 여행 (하권)중에서( 교회인가 받았음)

관상기도가 명상이 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가 있습니다. 저도 묵상이 전혀 없는 기도를 한 적이 있거든요. 좋아하는 단어나 구절 하나를 반복함으로써 다른 생각을 흘려버리는 기도였는데, 아무런 사고에도 걸리지 않고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게 하는 것을 보니, 그게 명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기도를 하는 내내 정신의 작용인지 성령의 일하심인지 늘 헛갈렸어요. 그 기도를 하다 보면 끊임없이 수행 가운데서도 정신의 가치를 진리인 양 찾아내 오는 것을 알게 되거든요. 그러면 묵상이 없으면서도, 단어에 마음을 실어서 나를 편안하게, 침묵 속으로 깊이깊이 어디론가 가게 해 주어요. 마치 뭔가를 초월하는 구도자처럼 말이죠. 그 기도로 경험한 그 어떤 곳은, 정신적인 자각으로 나 자신이 깨어서 가게 되는 곳입니다. 그 깨달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여간에 깨달음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을 체험해요. 아마 지식이 많고,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이 깨달음은 한없이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에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곳에 예수님이 안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세상을 깨닫고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니 평화로울 수 있어요. 또 그곳에선 자기가 이해하는 모든 것들을 정신으로 포용할 수 있어져요. 이곳에서는 자기가 가진 기준이 자기를 허용하기 때문에 쉽게 고지를 넘어서고 정진할 수 있는것이죠. 자기가 기준이 되니까, 자기를 판단하지 않고, 자기 논리를 스스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아져요. 그러면 내 삶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일들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해요.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도덕관념마저도 희석되게 될 수 있어요. 말하자면 보편성을 가름할 기준이 어느 시점부터는 자신이 된다고 받아들이면 되요. 이렇게 되니, 정화되지 않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들에 영적인 방해를 심하게 받아져요. 부딪쳐야 하는 사람들을 떠나서 더 깊은 고요 속으로 가고자 하게 됩니다. 그래서 홀로 되기 위해서 길을 떠나게 되는 일이, 바로 자기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세상을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에요.
(관상기도도 이런 방해를 받지만, 지나가는 과정처럼 극복하게 되어있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주는 힘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식을 대신해줄 명료하고 분명한 가치관, 즉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 것이에요. 실제 기도를 할 때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의해서 기도가 흘러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관상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의 현존 속에 있다고 믿으면 실제로 그 현존 가운데 있게 되요. 그리고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과 기도문들, 교회가 인정하는 어떤 자료들, 그리고 자신이 겪어내는 모든 일들이 그 관상 안에서 예수님의 현존으로 안내하게 되거든요. 이 과정을 통해서 기도하는 자신은 하느님의 질서 가운데 놓이게 되고, 그 질서의 힘으로, 그 힘에게, 자기 영혼을 다루게 하게 둡니다. 이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주시는 은총이에요.
관상의 목적이 마치 평화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지만 엄밀하게 말해 관상의 목적은 ‘예수님’ 그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실체를 보증해주는 것들, 성서가 자기 안에 들어올 때에, 그것은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을 설정하는 것과 같은 힘이 있어요. 성서를 밝혀주시는 분께서는 성령이시고 그 성령은 우리를 안전하게 예수님께로 안내하시거든요. 묵상 속에서 만난 특별한 나의 하느님을, 나의 인격에 투영된 주관적인 하느님을 모두의 하느님이 되도록 보편성을 부여하시는 분이 바로 이 성령이시니까요. 성서를 가지고 관상을 하게 되면, 성서 속의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자기만의 신앙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자신의 역사를 통해서, 또 자신의 성향을 통해서 지극히 주관적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주관적인 이 시각들이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빛에 의해서 성서가 조명되어지면 그때에는 그 주관 안에 교회안에서 객관성을 가지는 보편성을 부여 받게 되어요. 그래서 정말로 특별한 자신만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모두가 함께하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에요. 즉 이렇게 끌어내게 된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교회의 일치된 가르침에 접근하게 되는데, 이것이 마음 밭에서 관상을 지속시키게 하는 힘 입니다.
또 실제로 마음 밭 안에서 관상기도는 자기 안의 믿음이, 기도의 가장 깊은 저점(신과 하나가되는 합일)까지 쉽게 가게 하지 않아요. 명상이 스스로 자기를 허용하는 기준으로, 거기까지 한없이 깊이 들어가는 것과 확실히 달라요. 자기가 기준이 됨으로, 한없이 정신이 가게 할수 있는거죠.
하지만 관상기도를 통해서 쉽게 그 저점(하느님과의 합일)으로 가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기준 아니라 자기의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 앎과 실천을 통한 믿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아내면서 넘어야 하는 고지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은 기도하는 우리가 우리 마음 밭의 최상의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기 때문이며, 실제로 자기 안에서 자신을 다루는 힘(예수님, 성령, 하느님)과 질서에 마음 밭이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기도 중에 성령은 우리 안에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같도록 성찰을 요구하시고 계시니, 우리를 정신으로만 깊이 들어가게 하지 않는거죠. 이렇게 자기의 앎과 실천이 하나가 되는, 믿음에 일치되게 될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 다음으로 가게 하시거든요. 우리 안에서 우리 믿음을 실천하는 깊이만큼, 성령께서 운용하시는 그 질서를 따라서 더 깊이 가고, 못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는 동안 성령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의 조화와 질서를 만들어 줍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이렇게 성령께서 세우는 질서는 더 튼튼해지고 강해져요. 그래서 그게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보호하는 실질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서 성령을 청하는 일과, 제대로 머물기 위해서 성서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분명한 기준을 부여해주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예수님을 밝혀주시는 성령을 깊이 인식하고 붙잡지 않으면, 앞에서 경험한대로 기도는 어디로 흐르는지를 모르는 채로 가게 되어있어요. 기도 중에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의 어떤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지점, 즉 길을 잃게 되는 지점이 분명히 있어요.
여기서부터,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나아가는 것이 명상이라면, 신앙인으로서는 이 지점이 믿음의 정체성으로 가게 되는 길이에요. 제대로 성서를 통해서 묵상했다면,(교회의 가르침을 제대로 묵상했다면) 그 길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현존을 찾아 나서는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받게 되고, 그러면 성령께서는 그 어느 곳이라도 예수님의 현존 가운데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하십니다. 실제로 제대로 된 관상기도는 우리 삶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 이에요.
우리가 마음 밭까지 오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시간의 자신을 통과했어요. 그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확실히 받아졌을거에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믿음에 대한 실체, 즉 예수님의 현존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제대로 된 기도라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정신으로 세상을 초월하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당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내 삶의 현장으로 초대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마음 밭에서 받게 되는 기도들이, 생활 속에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자신들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지기 위한 힘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안에서 머무르는 기도들이에요. 이것이 진정한 관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이 없이, 즉 진실된 믿음에 대한 소망도 없이, 평화만을 갈구하면서 수행해야하는 명상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해요. 그러니 우리에게 예수님도 안 계시게 하면서, 또 자신의 십자가에 대한 인식도 주지 않은 채 다만 위로만을 주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하지 않는 평화는 예수님으로부터 온 관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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