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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4-05 조회수463 추천수6 반대(0) 신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 16-21)
-유 광수신부-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 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다. 무슨 단어인가???
"배"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다.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가파르나움으로 떠났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배는 어느 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라는 말로 끝난다. 배는 무엇인가? 배는 하나의 교통 수단이다. 물건을 실어 나르거나 사람들을 태워 목적지에 건너다 준다. 배를 타고 먼 여행을 하다보면 순항으로 즐거운 여행을 할 때에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높은 파도를 만나 생명의 위험까지 당할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여행자이다. 때로는 순탄한 여행을 할 때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 고생을 할 때도 있고 심하면 생명의 위험까지 당할 때도 있다. 나는 지금 무슨 배에 몸을 싫고 있는가?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안전한가? 무사히 항구에까지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인가? 순항 중인가? 아니면 높은 파도를 만나 표류하고 있는가? 어떤 이는 재물이라는 배를 타고 있고, 어떤 이는 권력, 명예, 안주, 게으름, 병마와의 싸움, 이기심, 자기 자신이라는 배를 타고 있다. 아무튼 우리가 무슨 배를 타고 있던 내가 타고 있는 배는 세월이 흐른 만큼 나를 어디론가 데려 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배는 어떤 배인가? 어느 배에 내 몸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가? 그 어떤 비 바람이 몰아쳐서 큰 풍랑이 일어나도 안전하게 나를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배는 어떤 배인가? 많은 사람들이 가장 안전한 "예수"라는 배를 타지 않고 예수 이외의 다른 배를 타고 있다. 앞에서도 열거하였거니와 "나"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환경"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사람"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이고 성직자 수도자도 마찬가지이다. 말로는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하느님"이라는 배를 타고 있지 않고 다른 배를 타고 있다. 그래서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금방 흔들리고 괴로워 한다. 즉 나를 바쳐주고 있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주위 환경, 자기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나를 바쳐주고 있기 때문에 마치 바람을 만난 배가 풍랑에 까뿔리듯이 내 인생이 그것에 의해 좌지 우지 된다. 정말 우리가 "하느님"이라는 배를 타고 있다면, 하느님께 내 몸을 완전히 맡겼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치 어린이가 어미 품에 안겨 평안히 잠을 자듯이 그렇게 편안함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이스라엘아,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주님만 바라고 살아가라."(시편 130,2-3)라는 시편작가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상황이 무척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한은 제자들의 이런 어려운 상황을 "이미 어두워졌는데도"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어두움, 또는 밤이라는 표현은 요한이 자주 어려운 상황을 이야기 할 때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어떤 어려움인가?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는 것과 마침 그 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고 있어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다.

왜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앞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을 아직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제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의 수준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시공간을 초월하시며 어느 곳에나 계시는 하느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고 단순히 인간적인 차원에서 머물고 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함께 있지 않으면 또 자기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믿음이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는 말씀 한마디로 바다와 바람까지 잠재우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님이 아니시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아직 초보단계이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금방 넘어지고 무너지는 미숙한 어린이 수준의 믿음이다. 성숙한 믿음은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요, 초월하는 믿음이다. 즉 주위 환경에 따라 좌지우지 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앞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단순히 배고픈 이들을 먹이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제정될 성체성사에 대한 일 단계 교육이다. 우리의 눈으로 보이는 밀떡이 단순한 밀떡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밀떡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의 몸으로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아직도 걸어가야 할 신앙여정이 남아 있다. 요한은 빵의 기적을 전해 주고 바로 이어서 오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은 과연 제자들이 빵의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보았는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았는가를 시험하기 위함이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았다면 절대로 지금 자기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일어났다고 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믿음은 아직도 멀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은 인간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에서든 현존하시고 모든 어려움을 없애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초보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초보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교육시키시는가?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가? 어떻게 당신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접근하시는가?

첫 번째는 그들이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 다가 가신다.
두 번째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그들이 평소에 많이 들었던 낮 익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청각적으로 다가 가신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가셨다는 것은 "홀로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기 9,8)라고 구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았다면 호수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어야 할 텐데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른 공관 복음에서는 유령인줄 알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두려움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알아 보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청각적인 표현도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모세가 하느님께 "당신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출애3,13)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나다."라는 표현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 양식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단계적으로 제자들의 믿음을 이끌어 주시면서 그들의 신앙 여정을 동반해주신다.

우리들이 생활하면서 어두움을 만날 때가 있다. 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 듯이 많은 시련들이 우리들을 뒤흔들 때가 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어떻게 극복하는가?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우리의 신앙은 어느 수준에 머물고 있었는가?
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주위 상황을 탓할 때도 있고, 또 주위 사람들에게 그 탓을 돌릴 때도 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우리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지 못한데 있다. 우리의 신앙이 아직까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되도록 질적으로 양성되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믿음으로 양성되도록 꾸준히 영성 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의 신앙은 맨 날 제 자리 걸음을 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20년 30십년 신앙생활을 하였어도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미성숙한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큰 고통과 시련의 파도 앞에 금방 휩쓸려 갈 것이며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도 호수 위를 걸어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고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분명히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시각적으로 또 청각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실 것이다. 오늘 나에게 다가 오시는 주님은 어떤 모습인가? 또 오늘 나에게 당신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들려 주시는 주님의 소리는 어떤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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