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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월 22일 야곱의 우물- 마르 2, 1-12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9-02-22 조회수463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마르 2,1-­12)
 
 
 
 
예수님께서 다시 카파르나움이라는 마을에 머물러 계시던 날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집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배고팠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행위’에 목말랐던 사람들입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이 왔던지 그 집 문 앞에까지 빈틈이 없습니다(마르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중풍에 걸려 사지가 마비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지 그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누워 지내며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는 분이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병도 고쳐주실 것 같습니다. 그분이라면 누워만 지내며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은 누워 있으나 마음은 벌써 그분에게 달려갑니다.
 
다행히도 그 마음에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보고 친구 넷이 그를 들것에 눕힌 채 데려왔습니다(2,3). 그러나 들것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 예수님께 가까이 가기에는 이미 그곳에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포기하고 돌아서야 할 처지입니다. 예수님을 뵙지 못하고 돌아서야 할 판입니다. 아닙니다. 그대로 발길을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꼭 치유받고 싶다는 ‘간절함’과 거기 계신 그분께서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이 그와 그의 친구들을 붙잡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2ㄴ-23)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믿음이 그들에게 좋은 생각을 끌어냅니다.
그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 예수님 계신 곳 바로 위에 덮었던 곳을 벗겨 구멍을 내고 그를 들것에 눕힌 채 밑으로 내려보냅니다. 그렇게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던 물리적인 장애물과 공간을 제거시킵니다. 막혔던 벽이 제거되고 거리가 사라집니다. 중풍 병자는 ‘아래로 내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가 되어주소서.”(시편 30,11) 예수님께서 그와 그들을 보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질병이 죄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사람들 가운데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 율법에 단단히 구속된 그들에게 예수님의 죄의 용서는 하느님 모독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알아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2,9-­10)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사도 10,43).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죄의 용서가 선포됩니다. 모세의 율법으로는 여러분이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될 수 없었지만,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 안에서 모든 죄를 벗어나 의롭게 됩니다.”(사도 13,38-­39)

히브리어로 ‘죄’는 ‘과녁을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상태에서 벗어난 것, 빗나간 삶을 가리킵니다. 육신이 마비되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이 주위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한 채 살 수밖에 없었던 중풍 병자는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이제 그는 용서받았습니다. 죄에서 벗어나 온전한 상태로 다시 돌아옵니다. 자신의 두 발로 일어설 수 없었던 그는 일어나 자신이 누워 있던 들것을 들고 나갑니다(마르 2,12).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말라 3,20)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이사 43,18-­19.21)

주님, 오늘 제 몸을 일으킵니다. 제 두 발로 굳건히 일어섭니다. 예전의 얽매임을 훌훌 털어버리고 묶여 있음에서 자유롭게 벗어납니다. 그리고 두 팔 벌려 당신께서 하시는 새 일을 찬양합니다.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의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제게 은혜를 베푸셨기에 주님께 노래하오리다.”(시편 13,6)
강선남(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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