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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통 속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작성자김용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5 조회수586 추천수1 반대(0) 신고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전례의식 특히 성체성사는 지루하고 생명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불만을 많이 토로한다. 대신에 성체성사를 마치 살아있는듯이, 보다 재미 있게, 보다 성가를 많이 넣고, 보다 기쁘게 만들고 싶어 한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급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도 좋지만 불만의 뿌리는 아름다운 성가와 훌륭한 강론뿐만 아니라 자신의 실제 삶도 그랬으면 하는 것이다. 왜?
 
랭돈 질키(Langdon Gilkey)는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종교적인 장소에서가 아니라 평범한 곳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맞는 말이다. 종교적인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찬양할 것이 아니라 평범한 곳에서 자신이 느끼는 설레는 마음을 찬양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평범한 곳이란 기쁨과 감사뿐만 아니라 비통함, 의심, 편협함, 편집증, 질투와 무거운 마음 등으로 채워져 있는 곳이다. 실제로 신자들이 제단 주변에 둘러 앉아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이러한 감정들이 자동적으로 사라지지는 않으며, 비록 성체성사와 같은 기쁨은 느낄 수 없을지라도 평범한 장소에서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수가 더 많다. 집이나 직장에서처럼 성체성사를 하는 중에도 의심을 하고 질투를 하고 어떤 판단을 하고 편집증에 시달리고 오해를 하는 수가 많은 것이다. 가족이 식탁에까지 마음의 상처를 가져오듯 성체성사를 모시는 제단 주위에서도 같은 상처를 갖고 앉아 있는 것이다.
 
예배 시에는 기쁨과 감사를 찬양할 뿐만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 고통 속에서 신음하기도 하며, 편집증을 드러내어 놓고, 질투심을 줄이고, 서로간의 거리를 좁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서로 상처도 주고 받고, 서로 용서하고 포옹하여야 한다. 그러면 전례의식을 통하여 비통한 심정, 증오와 의심이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보면 성체성사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잘못은 노래하지 않고 춤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거운 분위기를 깨지 않는 데 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도 분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한 마음이 되려고 해도, 이별의 고통, 편집증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 이기심, 비통함, 마음의 상처, 질투심, 편협함, 공격성, 부끄러움 등의 장애가 있게 마련이다. 성체성사 시에 우리들을 서로 떼어 놓고 있는 이와 같은 장벽을 허물지 못한다면 일상생활에서도 우리 사이에 있는 꼭 같은 장벽을 없앨 수 없게 된다. 짐 왈리스(Jim Wallis)가 정곡을 찔러 말했다. “예배를 통하여 공동체가 교화(敎化)된다….. 예배를 통해서도 교화가 되지 않는다면 아마 일상생활에서도 교화되지 않고 전도를 한다 해도 교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감동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가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도 고통 중에 있을 때가 많았다. 그리스도가 거듭하여 우리들에게 요구했던 유일한 의식이 성체성사였다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는 성체성사 시에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고, 허탈감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놀라고, 경멸을 받고, 연약하고 고통 중에 있는 그리스도를 기억한다. 우리들이 이 의식을 제대로 기념하려면 그리스도께서 첫 영성체를 하실 때 가지셨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때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바로 기쁨과 감사이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이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전에 또 박해에 익숙해지기 전에는, 고통도 느끼고 무언가를 갈망하시고 고통을 예견하시며 두려워하셨다.
 
예수님께서 정원에서 첫 성체를 주신 후 고통을 다스리고 걱정을 잠재우기 위하여 외딴 곳으로 가신 것처럼 가끔 영성체를 하지 않고 떠나보는 것도 좋다.
 
가끔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성체를 받는 사람에게 성체를 나누어 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라.”하고 말하곤 했다. 어거스틴 성인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것은 나의 몸, 이것은 나의 피”라는 성변화(聖變化)의 말은 빵과 포도주를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현재의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사람이 하느님의 현존이 되고, 빵과 포도주가 이 세상을 위한 음식과 마실 것이 되는 것보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위한 음식과 마실 것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임무이다. 즉 사람을 변화시키고 우리들로부터 하느님의 현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려면 우리들 사이를 떼어 놓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상처와 증오를 찾아내어 없애버리지 않으면, 영성체를 하여도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 상처와 증오를 찾아 내어 없애버리면 같이 굳어 있는 마음이 살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뀌고 비통함이 자선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활기찬 전례, 훌륭한 강론, 아름다운 성가는  이렇게 변화시키지 못하며 전례가 의미가 없다는 불평만 더 많게 할 것이다.  자기 방어, 상호 의심,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자세가 없어져야만 참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불평 안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려면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새로이 태어날 때에는 눈물과 고통이 있게 마련이다. 춤추기 전에 고통을 먼저 다독거려야 한다..
(롤하이저 신부님의 묵상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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