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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르겐 몰트만 [혁명적 윤리, 유토피아]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3 조회수464 추천수5 반대(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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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에 들어와서 세계대전과 공산혁명의 참화 등으로 인해 미래에 대한 소박한 진보를 꿈꾸던 인류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거나 사라졌고, 무신론적 실존주의, 허무주의 등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그리하여 신학도 개인적 실존주의에 모든 것을 걸거나, 하나님의 죽음과 세속화를 새로운 디딤돌로 삼아 새 출발을 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와 같은 흐름에 돌연히 종지부를 찍은 것은 바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1967년)이었다. "로마서 강해"(1921년)가 스위스의 무명의 시골 목사 칼 바르트(K. Barth))를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로 만든 책이라고 한다면, "희망의 신학"은 33살의 새파란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슈피겔(Die Spiegel)은 이 책이 "그리스도인의 창백한 피 속에 철분을 공급하였다,"고 평했고,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는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 때문에 기반을 잃어버렸다."고 평했다. 

비록 몰트만은 신학에서 "역사와 종말론"이 차지하는 중심적인 비중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를 가장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대변한 신학자로서 갑자기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책에서 몰트만은 다양한 신학의 재료들을 서로 엮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서 사용된 신학의 재료들은 구약성서의 약속의 신학,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파루시아(Parusia)의 신학, 홀랜드의 사도직의 신학, 혁명적인 윤리였다. 하지만 "희망의 신학"의 집필에 결정적인 동기를 준 것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였다. 이 책을 읽은 후 몰트만은 즉각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바로 그 자신의 주제가 되어야 할 이 희망이라는 주제를 내팽개쳤는가?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초대교회의 희망의 영이 어디에 남아 있는가?

몰트만은 성서에 나타난 약속, 묵시적 희망, 사도직, 하나님 나라의 신학,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희망의 철학을 서로 결합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듯이, 몰트만이 블로흐의 철학을 계승하거나 각색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블로흐가 현대적 무신론을 희망의 토대로 삼아 "무신론이 없다면 메시야 사상의 여지도 없다"고 말했다면, 몰트만은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 블로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행복을 누릴 사회적 유토피아를 다시금 복원하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자들이 인간적 존엄성을 되찾게 될 정의의 유토피아를 불러들이려고 했다면, 몰트만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 성서의 증언에 토대를 둔 희망을 중시하고, 이를 사회적 유토피아와 정의의 유토피아의 토대로 삼으려고 했다.

"희망의 신학"은 큰 공감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하나의 놀라운 신학적 전환을 이룩했다. 비록 몰트만이 미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은 결정적인 때를 맞이하였다. 1960년대는 실로 미래를 향한 출발과 전향의 시대였으며, 희망을 통해 거듭난 시대였다. 그 당시에 매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위대한 희망은 작고 제한된 많은 활동들, 즉 환경 운동, 평화 운동, 여성 운동과 같은 여러 운동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의 신학의 영향 아래 정치신학, 흑인신학, 해방신학, 제3세계의 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이 등장했다.

 

 

< 출처 : 네이버 / 계속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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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

몰트만(자유주의 신학자)은 ... 예수는 바로 미래를 담지하는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즉 미래로부터 오는 자라고 한다. 그의 부활을 과거 사건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시작과 역사의 근저로 본다. 즉 부활을 미래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다. 계시는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명제적이라 한다면 그 계시가 근거하는 미래는 열린 미래가 아니라 닫힌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해 정의할 때도 미래의 틀로서 정의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와 같이 인간을 변하지 않는 존재로 정의하기보다는 ‘되어감’으로 정의한다. 교회에 대해 말하기를 마치 역사의 마지막이 이미 이르른 것처럼 현재에 초점을 두는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교회는 '세상의 종'으로서 미래의 약속을 선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에는 이미 정해진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만이 윤리의 규범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윤리의 기준은 미래의 결과에 대한 기대라고 한다. 즉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가 우리를 소외당한자들과 눌린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가’를 기대하면서 지금의 ‘무엇’에 도전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혁명을 환영한다.

그의 신학 중 특이할 만한 점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십자가 사건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존재론적(ontological)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일종의 경세적(economic)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경세적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구속사적 차원의 경세적 삼위일체가 아니다.

다른 많은 자유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사건 속에서 발생되는 모습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십자가 사건속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교회에 부여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역사를 성령으로 정의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에서 발생된 십자가 사건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십자가 사건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열림을 확증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신학은 철저한 변증법적(dialectical) 신학이다. 역사의 역동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역사적 역동성 역시 변증법적 틀안에서의 모습이다. 이런 차원에서 몰트만은 칸트와 헤겔을 종합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결코 미래의 하나님이 현재 역사속에 현존지 않는다는 아이디어는 멀게는 칸트, 가깝게는 바르트에서 답습했다 하겠고, 미래(혹은 종말)와 현재가 역사라는 존재의 틀속에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된다는 생각은 헤겔에서 왔다.

또한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가 있다는 초월적 하나님이라는 실존주의적 개념은 사실 현재속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고 계속적으로 열린 미래로 남겨져 있다는 몰트만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미래적 하나님 혹은 약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은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 하나님 혹은 바르트의 전적으로 감추어진 하나님과 같은) 현재의 그 무엇과도 결코 동일시 되지 않는 긴장속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미래적이라는 몰트만의 주장은 하나님의 핵심적 성품은 그의 자유라는 바르트의 생각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 천상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나는 분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계셔서 그리스도에서 자신을 전적으로 감추시고 동시에 전적으로 나타나셨다는 바르트의 주장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실 우리로 미래에 대해 희망하도록 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어떠한 근거가 없니는 불가능한 것이다. 몰트만은 그 근거를 추상적 미래에 두는데 그런 미래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 즉 그런 미래는 없다고 믿는 것과 그런 추상적 미래가 있다고 믿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미래가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져 있다고 하는데 만약 희망을 위한 어떠한 근거가 미래에 있다면 그 미래는 전적으로 순수하게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전적으로 순수하게 미래가 열렸다는 것은 일종의 절대적 신적 의미를 미래에 부여하려는 발상인데 이러한 발상은 비합리적(irrational) 신념과도 같은 것이다. 그 신념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 신념은 바로 현재 몰트만 자신에 있는 것이다. 즉 결코 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 혹은 종말은 구체적 과거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적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몰트만이 주장하듯 미래에 속한 사건이 아니다. 사도들이 귀로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손으로 만진 바다.

몰트만의 십자가-부활 사건 해석은 그 옛날 영지주의나 가현설과 같은 이단 사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 십자가-부활 사건은 계속 우리 현재에 그 구성적(constitutive) 힘을 끼치고 그가 재림하실 때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부활 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규범적 근거와 종말론적 근거가 추상적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역사적 사건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모르고 미래에 대해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즉 희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은 미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에 근거해서 가질 수 있는 지식이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우리가 무엇인가 미래에 대해 기대하고 희망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과거와 현재없이 중립적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몰트만은 역사속에 과거-현재-미래라는 등식이 아니라 거꾸로 미래-현재-과거라는 등식을 세워 마치 미래가 현재을 구성(constitute)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데 이것은 허구일 뿐이다.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희망하고 신뢰하는 것은 그 미래가 항상 열려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일 그리고 지금 이루시는 일로 인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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