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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트만의 신학사상 [불신앙의 철학사상/바알과 예수]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09-02 조회수947 추천수2 반대(0) 신고
 
 
< 2008-08-27 오후 12:47:52  정치를 일깨우는 것과 주님을 알리는 것 123653번 글의 댓글 48개 중에서 >
 
 

장이수 ( (2008/08/27) : <인간 원죄에서 오는 제도적인 악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 이는 신학이 아닙니다. 사상입니다. 사회과학의 차원입니다. 신학의 틀을 만들어서 <인간의 내재적 초월성>과 함께 결합시켜 '정치신학'을 종교로 규정하여 하느님의 진리로 탈바꿈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리 = 하느님의 계시 = 하느님의 자기 전달 ... 입니다. <정치를 신학의 틀>로 끼워 넣어 인간 중심의 메시아 도래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 (사랑의 결핍을 없애라 하신 사랑의 계명)을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tpwkdygks624)

장준영 ( (2008/08/27) : 신학은 구원의 신비에 대하여 논하는 학문임과 동시에, 하느님 안에서 인간을 논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신학 역시 사상이지요.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임과 동시에 인간이 저술한 문서이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더욱이, 신학은, 계시인 성서가 아닌, 계시에 대한 인간의 해석학 아닙니까? 장 선생님께서 계속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면, 저로서도 더 말씀드려봤자 별 의미는 없을 것 같습니다.joon2833)

장이수 ( (2008/08/27) : 인간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씀이 인간을 해석해야 합니다. 장준영님께서는 학문을 이야기 하고, 저는 신앙을 이야기 합니다. 성령을 벗어나면 인간이 계시(말씀)을 해석하려는 교만에 빠지게 되지요.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성령의 힘으로 인간을 해석합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습니다. < 인간이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씀이 인간을 해석해야 합니다. > 인간은 하느님(주관자)과 일치 합일해야 합니다.tpwkdygks624)

장이수 ( (2008/08/27) : 네, ... 저도 좀 더 묵상해 보겠습니다. (저도 분명하게 부족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존경하는 장준영님이심을 잊지 말아주시길 빕니다. 언제나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한 형제님을 뵙게되어 기쁩니다. 주님의 평안을 빌며 늘 건강하시길 소망합니다.tpwkdygks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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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아래 내용은 네이버 지식인에서 참조함>

 

모든 사상은 뿌리가 있습니다. 볼트만의 사상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먼저 검토해 봐야겠죠. 오늘날 볼트만 등의 사상을 혼합한 교단(교파)를 자유주의 라고 합니다. 자유주의는 신정통주의와 혼합됩니다. 장로교에서 이런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혼합한 것은 모순(矛盾)입니다. 즉 물과 기름식으로 합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바알과 예수를 같이 신봉할 수 없는 것입니다.

 Rudolf Bultmann:루돌프 불트만(1884-1926):독일 신학자.

칼 발트(신정통주의)에 영향 받았으며 발트는 하르낙과 헤르만에게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음.
불트만,브룬너,메르츠 등과 변증법적 신학파를 형성함.

불트만은 하나님의 왕국은 주님 때도 없었고 장차있을 성질의 것도 아니라 했음.
이들은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자들임.

신약을 非神話化에 의한 실재론적 해석을 함.
이 방법론 때문에 하이데거 철학에 깊이 의존했음.
발트는 실존철학을 배제한데 대해, 불트만은 이를 방법론에 채택했음.
이에 두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

창세기 기사는 종교적 신화만을 묘사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이 잘못 깨닫고 그렇게 믿은것 뿐이라했음.

'예수'(1926)라는 책은 예수의 인격을 연구에서 제외 했기에 '루돌프 오토'는 '예수가 없는 예수에 대한 책'이라고 비판했음.

복음서의 종말관을 신화로 보았음.
예수의 구속 사업이 요한복음 에서는 영지주의(그노시스주의)의 표현으로 발견된다고 하면서 '영지주의의 신화화 사상을 볼수 있다. 영지주의의 신화는 구속이라는것을 현재적 실현으로 말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의 사상이 그러하다. 요한복음에서 종말관적 사건이 현재에 벌써 실현된 것으로 말한다.
이런 사상은 유대식 종말관과는 다른 것이다. 유대식의 것은 미래를 수평선적으로 내다본다'하여 신약의 수평선적 종말관(시간을 직선으로 내다보고 장래어떤 시점에 심판이 있다는것)을 하나의 신화로 보고 그것은 비신화화 되어야 한다고 했음.

이런 사상은 성경을 곡해한 것으로 요한복음뿐 아니라 성경전체를 곡해하는 사상임.

요6:51-58은 예수교의 성찬과 관련되었다고 하면서 성찬은 헬라종교들의 신비적 의식(헬라의 푸리기안 신비의식,지금의 아프리카 의식과 비슷.북치며 먹고 마시는 의식)에서 유래 되었다고 했음.
요14:1-6은 그노시스주의의 신화에 의한 것이라함.

그러나 불트만은 성경을 곡해한 것이다.
그노시스 내세관은 영혼이 하늘에 간다고 하나 범신론적 이며, 유출설에 속한다.

결국 불트만은 성경의 비신화화 작업을 한것이며 이는 불신앙에서 나온 이성적 철학 사상이다.

***스킬더 박사의 평 과 헬만 바빙크의 평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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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불트만(1884-1976)의 신학사상

불트만은 1884년 독일의 올덴부르크 지방의 한 루터교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의 튜빙겐, 베를린, 말부르크 등의 주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말부르크에서는  빌헬름 헤르만 교수에게 칼 바르트, 프레드릭 고가르텐과 함께 강의를 들었다. 그후 브레스라우와 기센 등지로 옮겨다니며 가르치다가 1921년에 그의 모교인 말부르크로 돌아와 1951년 퇴임할 때까지 거기서 봉직하다가 1976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공관복음서의 전승사](1921), [예수] (1926), [신앙과 이해](1933), [신약성서 신학](1948)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많은 저서와 논문 등이 있다. 1941에는 "비신화화"에 대한 신학의 새로운 주제를 발표하여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불트만은 신약 성경 학자였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현대의 지성에게 이해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신약 성경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을 채택했다. 그것은 고대 문서의 메시지가 개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개인의 신앙적 반응을 촉구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 그는 신약 성경의 주해와 조직신학 사이에 격차가 없는 것으로 보았으며, 오히려 양자의 임무는 신약 성경을 통하여 그 개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함으로써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과 역사적 예수: 19세기말 역사적 예수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역사비평의 방법은 예수의 역사를 단순하게 복음서들에 나타난 그의 초상과 동일시할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신약의 본문들 속에 선포된 그리스도와 본문들 이면에 놓여 있는 진정한 역사적 예수 중 어느 것을 규범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19세기말 성경학자들은 역사적 예수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연구](1906)에서 그러한 예수를 찾는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고 결론을 내렸다. 연구자들이 본문으로부터 재구성한 예수의 모습은 그들 자신의 상상을 반영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마틴 켈러(폴 틸리히의 선생)는 [소위 역사적 예수와 역사, 성경적 그리스도](1896)에서 신약 성경의 의미를 푸는 열쇠는 그것이 묘사하는 역사나 역사적 연구 방법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선포한 메시지를 통하여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는 선포된 그 그리스도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마틴 켈러의 역사 성경적 예수는 성경 이면의 역사적 예수라기보다는 교회가 선포한 신앙의 예수, 즉 당시의 제자들이 신앙 가운데 받아들인 예수 그리고 제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예수이다. 마틴 켈러는 폴 틸리히의 기독론과 불트만의 신앙적 그리스도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는 알 수 없으며, 복음서의 예수는 헬레니즘화된 예수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예수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기독교 신앙에 문제가 된다고 보지 않았다. 신앙의 중심은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교회가 선포한 예수,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즉 메시지라고 주장했다. 신앙은 역사적 연구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역사의 예수에 대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며 지금 실존적 상황에서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예수는 신앙과 별 관련성이 없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적 자료와 지식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셨다는 선포인 복음의 메시지 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반응이다. 신앙은 케리그마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발생한 일들이 신앙과 전혀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부정하려고 했던 것은 신앙이 역사적 탐구에 의해서 떠받쳐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행동이 있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적 연구가 아니고, 신앙의 눈에만 그것이 보일 뿐이다.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의 초점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신정통주의의 특징인 계시의 케리그마적 이해를 충실하게 대변하는 대변자였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는 한 개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와 부딪히게 되는 그 현재적 조우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사건들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구속적인 행위를 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 

종말론: 19세기 낙관론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의 종교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그의 윤리적 가르침, 진리, 그의 인격을 강조하는 반면 그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무시하였다. 그러나 성경에서 묵시 문학의 중요성을 요하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쳐에의해 재발견 되었고 불트만은 그들의 연구를 기초로 신약의 종말론을 재해석했다. 불트만은 그 메시지가 처음 주어졌던 당시의 시간에 국한된 의미를 넘어서서 그것을 실존주의적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영생을 말하며 종말을 논의할 때, 미래적 종말이 아닌 소외된 현실의 실존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으로의 전이, 즉 신앙으로 얻어지는 현재적이며 실존적 실재로서 종말을 말하고 있었다.

신화론: 자유주의 신학은 신화들 가운데 발견되는 영원한 진리들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신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트만은 여기에 반대하였다. 그는 신화를 제거하면 신약 성경의 진정한 메시지인 '케리그마'도 상실되기 때문에 신화 제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화의 제거가 아닌 신화의 해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그가 말했던 '비신화화'라는 용어의 의미이다. 그는 본문에서 신화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그 요소들의 의미를 정확히 실존적 의미에 따라 이해하기를 바랬다. 불트만이 가지고 있는 최우선적 관심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마다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실재실존적으로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비신화화 작업은 이러한 만남이 가능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해석학: 자유주의 신학은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적 사고 사이에 벌어져 있는 격차를 좁히기 위한 노력으로 그 문서들 속에서 '영원한' 진리들을 찾아냈다. 그들에게는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가 가르쳤던 윤리적 원인들이었다. 즉 그들은 본문에 보편적이고 영원한 원리들이 들어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객관적인 해석학적 수단들에 의하여 발견될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트만은 독자의 본문의 관계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본문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들을 가지고 가느냐에 따라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답이 결정되는 것이며, 본문이 다루는 주제와 우리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가 질문을 결정한다고 말했다(그리스도와 신화, 51). 불트만은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격차는 우리의 주해작업에 적절한 '전이해'를 수용할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고대의 텍스트와 현대의 독자를 연결시켜 주는 질문은 인간 실존에 대한 것이었다(그리스도와 신화, 53). 그들의 신화적 우주관 -이것은 신화적 세계관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자들은 어느 시대에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놓여 있는 동일한 질문인 인간의 개인적 실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불트만은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실존주의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각과 개념들을" 제시하기 때문에, 성경문서들에 접근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전이해를 제공한다고 말했다(그리스도와 신화, 55). 인간 실존에 관한 결정적인 질문그 본문에 가지고 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성경의 '케리그마'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초월자와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초월: 불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이라는 개념을 그의 종교 사상 전반에 급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적용하고자 했다. 그가 나름대로 재구성한 바에 의하면, 고대인들은 우주를 공간적 의미의 3층 구조, 즉 하나님과 위에 있는 천국 그리고 땅 아래 지옥이 놓여 있다는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불트만은 한마디로 이러한 우주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서로 모순이 된다고 주장했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은 더 이상 공간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다. 대신 불트만은 비공간적 이해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 세계관의 또 다른 차원에 기초한 것이었다. 신적 초월성을 특정 시간에 한정되지 않는 영원한 것이며, 물질과 관능의 세계와 대조되는 정신으로 보았던 희랍적 개념과는 대립적으로 성경적 초월성이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불트만은 하나의 실존적인 이해를 제시했던 것이다. 초월성이란 하나님이 결단이 필요한 실존적 순간에 우리 앞에 나와 서서 우리에게 그의 말씀으로 말씀하시며 믿음의 반응을 보이도록 도전함으로써 본래적 실존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 안에 드러낸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개인적 신앙의 반응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이 자기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전달이나,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그 개인을 불러서 반응하도록 촉구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말할 수 없고 다만 인격적인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말하는 자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말하는 중립적인 자세는 배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관념의 체계가 아니라 그 개인에게 주어진 (주관적 체험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실존주의와 신학: 슈버트 옥덴은 불트만의 신학적 동기는 일차적 동기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성을 지키고자 하는 관심이었다고 한다. 실존주의를 통하면 "그가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그가 아는 한에서 그 밖의 어떤 개념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적절히 표현할 수 있다(존재와 신앙, 19)"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불트만의 이러한 움직임이 그가 극복하고자 했던 해석학의 문제, 즉 어떤 텍스트에 접근할 때 그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되 이미 알고 있는 개념들로 그 본문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그 본문을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에 기인한다고 본다. 불트만은 다만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이 해석학적 원리로서 유일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보았다(Young, 역사와 실존신학, 48). 우리는 불트만의 이러한 동기를 그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 가운에 하나에 국한된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그는 분명히 실존주의에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모든 문제 전반을 다룰 수 있는 유용한 열쇠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가 다루었던 문제들에는 신의 초월의 문제, 해석학적 문제, 신화, 종말론, 역사적 예수 등의 문제가 포함된다.  즉 "하나님은 오늘의 인간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시는가"라는 질문이다. 불트만의 반응은 신약 성경 자체를 통하여 그리고 실존 철학에서 발견한 인간 실존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로서 초월한 모습 속에서 인간 개인에게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급진적으로 삶을 바꾸는 반응을 촉구한다. 그러므로 그 정의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담론인 신학이 동시에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와 신약성경: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이데거는 그에게 소위 인간에 대한 객관화 된 견해만을 제공할 뿐인 전통적인 존재론들과 맞서는 하나의 대안을 제고해 주었다. 전통적인 존재론들은 인간을 볼 때 각각의 인간이 인격적 결단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인간 됨을 결정하는 한 개인으로서 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개념으로, 즉 역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어 그 인간을 보편적인 측면에서 본다. 그러나 불트만은 자신이 하이데거의 신약 성경 해석을 슬그머니 도용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실존주의에서 발견되는 기본적인 방향성이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구조들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실존주의를 신학에 가해지는 외부적인 영향력으로 보지 않고 신약 성경의 메시지 자체의 핵심 정수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이 복음의 메시지만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제기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 답이 주어지는 틀인 기본적 개념의 체계, 즉 인간 실존의 영역을 제시하기 때문에 이 철학을 신학적 작업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 편입시켰다. 

실존주의 범주들: 그가 사용한 실존주의 범주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실존' 바로 그 자체의 범주였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실존이란 결코 일반적인 것이나 보편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 그 개인과 그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존재를 과학적인 의미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와 인격적 선택을 다룬다는 의미에서 실존적 의미로 보았다. 결과적으로 존재란 매순간 발생하는 하나의 단회적 사건이지 일직선상에서 진행되는 발전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이 하나의 주어진 순간 속에서 내리는 결단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물상의 존재를 구별하였다. 전자를 실존이라고 칭한 반면, 후자를 '존재'라고 불렀다. 하이데거의 영향에 나타난 것으로써 불트만 신학의 핵심에는 '실존'과 '세계' 사이의 구분이 존재한다. 두 번째로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역사성 이해에 그 기초를 두었다. 그는 각 개인이 역사적 존재라고 언명했다. 이것은 우리가 각 개인을 볼 때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지 자연의 영원한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각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역사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불트만은 주장하기를 각 개인이 중요한 것은 자신과 인생 과정을 통하여 일어나는 일들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고정된 본질이 아닌 바로 이러한 반응들에 의하여 그 개인이 누구인가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삶은 과거가 아닌 미래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개인의 결정들에 의하여 형성된다. 

본래적 실존: 존재와 역사성의 개념들과 관련된 것으로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 사이에 중요한 변증법이 존재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던져졌다는 도전을 수용할 때마다 일종의 본래적 실존(authentic existence)을 발현시킨다. 반면, 그들이 이 세상과 자신 사이의 구분을 상실할 때마다 비본래적 실존(inauthentic existence)을 발현시킨다. 불트만은 죄(불신앙)와 신앙이라는 성경의 용어들 사이의 구분을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도식을 사용했다. 비본래적 실존은 '세상' 즉 현실적인 것들의 영역이나 자신이 이룩한 성취들 또는 과거 속에서 안정성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 안에서만 자기를 이해하려는 것으로서 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본래적 실존은 삶의 기초를 '세상'에 두기를 거부하는 대신, 자기 중심적인 안정성을 부인하고 미래에 대하여 자신을 여는 개방성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삶의 기초를 둔다. 이것은 신앙, 곧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헌탁(commitment)이다. 그리고 하나의 새로운 자기 이해는 신앙을 통하여 나온다. 신앙은 그 개인이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역사: 역사란 단순히 비인격적이며 초연한 태도로 과거의 사실들에 대하여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의미있는 역사적 지식이란 항상 실존주의적 지식이다. 그것은 인격적 만남을 이루며 역사와의 교섭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불트만은 마틴 켈러로부터 '히스토리'(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였다. 불트만에 따르면 초연한 중립적 관찰(히스토리)은 과거를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보고 거기서 사실적 정보망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사건들을 인간 실존이라는 문제의 시각에서 접근하면 더 이상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아니라 현재적 사건이 되어(게쉬히테) 한 개인의 인격적 실존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단순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역사, 곧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며 의미를 주는 사건들이다. 이러한 역사관에 관련된 것이 불트만의 시간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하이데거의 '염려'에 대한 삼중 구조로부터 따왔다. 불트만은 시간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누는 일반적 구분이 현재를 비차원적인 수학적 점으로 삼고 과거와 미래를 나누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보았다. 반면, 하이데거의 실존적 시간 이해는 현재를 결단의 시점으로 보고 현재에 초점을 맞추었다. '과거'가 단순히 한 번 일어났던 일을 가리키기보다는 비본래성의 영역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에 그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되는 것은 과거란 결정의 부재나 가능성이 결핍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과거는 이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가능성을 가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과거와 연관되어 있는 비본래성은 과거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개인의 실존에 부가된다. 미래는 '아직 아닌 것' 그 이상이다. 그것은 결단을 요구하는 가능성의 영역이다. 한 사람의 현 존재 속에서 그 개인은 미래, 곧 가능성의 영역에 직면한다. 결과적으로, 각 사람은 미래로부터 살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이제 '현재'는 단순히 '지금'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적 결단의 상황, 즉 과거와 미래를 통합시켜 본래적 실존으로 만들어야 할 결단의 상황이다.

신앙과 복음: 불트만은 여기서 하이데거와 결별하였는데 바로 기독교적 '케리그마'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본래적 실존이 외부의 도움이 없이도 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희망을 내비쳤던 하이데거와 달리 불트만은 기독교적 선포에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오직 믿음의 반응을 보임으로써만 나타나며, 그 반응 자체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하나의 기적이라고 주장했다. 바울의 말에 따라 그는 '케리그마'가 구원 사건으로서의 십자가의 부활에 대한 설교라고 주장했고, 이 두사건은 불가분리의 연합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나사렛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우리가 주목해 본 바대로, 불트만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역사는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야성적 사실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신학자로서의 생애 초기에 그는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속죄와 용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모든 이론들을 배척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의 개개인들에게 주어질 때 그것들이 지속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케리그마'에 대하여 반응할 때,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경험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될 때, 십자가는(불트만은 이것을 예수의 역사의 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이 인류를 해방하기 위한 인류에 대한 심판이다. 부활은(불트만은 이것을 과거 역사의 한 사건으로서 말하기를 거부했다)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거나 예수가 피안의 생명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십자가의 구원의 효력을 믿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불트만은 주장했다. 기독교 메시지의 선포가 믿음을 낳는다고 불트만은 말했는데 믿음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와 대면하는 장소이며 그것을 듣는 자에게 그것은 '종말론적 사건'이 된다. '케리그마'를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자를 위하여 이 (낡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온다. 

 

비판

보수주의자들은 이 독일 학자가 성경의 권위를 위태롭게 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가 신화적 범주를 성경에 적용한 것에 대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Young)의 요약은 이러한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 "불트만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시의 역사가 아니다. 예수는 세계 역사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적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와 청취 속에서 그렇게 화(化)한다. 하나님의 행위의 초월적 특성은 특별한 의미로만 유지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 후에 있었던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의 차원이라는 등등." 불트만의 프로그램의 중심에는 주요한 신학적 문제가 놓여 있다. 이 문제는 세 가지 주요한 약점들로 확인된다. 첫 번째는 주해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생활에, 세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일방적인 주해: 첫째 불트만은 실존주의라는 여과망을 신약학에 적용함으로써 지나치게 단순화된 주해를 하는 경향을 낳았고, 그것은 또 한쪽 측면만을 말하는 신학을 낳게 되었다. 신약 성경의 '케리그마'는 본질적으로는 실존적 강설이라는 그의 주장이, 한편으로 그 문서가 말하려는 주요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문서에서 제시하려는 바를 거두절미한 왜곡이다. 많은 본문들이 단순히 불트만이 공식처럼 제시한 인간 실존의 이슈를 다루지 않고, 다른 주제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신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예수의 생애에 관한 내용을 별 무관한 것으로 여겼는데, 이는 그가 신앙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했다는 메시지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그렇게 보면 "구체적인 역사성이라는 것은 항상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고, 가능해지고, 일정한 한계가 정해지는 것이지, 그 역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지 못한다." 우리 신앙의 표현으로서 예수의 역사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그 역사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유화된 신앙: 둘째로 불트만의 신학적 접근법은 복음 메시지에 대한 너무 좁은 이해와 함께 곧 너무 좁고, 사유화한 신앙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본래적 삶의 문제에서 그것도 매우 개인화된 모습의 인격적 결단이다.
  불트만의 실존주의적 강조는 기독교 신앙의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인 차원들을 제외시킬 위험이 있다. 그는 믿음이 신자의 삶에 미치는 외적 영향이나 신자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서는 거의 강조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볼 때 불트만의 프로그램은 개인의 칭의(그 개인이 비본래성으로부터 본래성으로 변모하고자 하는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성화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실제적인 삶의 역학, 서로가 연합하는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들로서 영적 성장을 해 가는 것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왜곡된 하나님: 셋째로 불트만은 그의 실존주의적 여과망의 영향 아래 무한한 질적 차이라는 주제를 급진적으로 적용한 결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왜곡되기에 이르렀다. 신학적 강화를 인간 실존의 차원에만 국한시키다보니 하나님의 영원한 실재라든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 등에 대한 주장을 배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트만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동하시는 경우에만, 즉 그 분이 본래적 실존을 창조하시는 한에서만 그 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신학을 본래적 실존으로 이끌어 가는 하나님과의 체험적 만남에 대한 성찰로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한에서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고 한 불트만의 주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을 인간의 신학적 주장의 한계 밖에 놓이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원한 신적 실재로는 알 수 없게 된다. "신앙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비는 하나님이 그 자체로서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는 인간과 더불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주장이 하나의 중요한 진리에 대하여 지적하고는 있지만, 신약 성경과 신학사 등과 비교할 때 한마디로 신학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너무 축소시켰음을 알 수 있다.
  불트만은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대부분의 진술들을 신화적이라고 분류하는 한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을 위하여 단번에' 행하셨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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