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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2주일/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작성자원근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3-04-06 조회수463 추천수0 반대(0) 신고

 

        “주 참으로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활신앙은 선(善)이 악(惡)을,
         빛이 어둠을, 진리가 거짓을 이긴다는 믿음이다,
         신자생활은 매일 죽고 부활하는 삶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제자 토마스에게 발현하십니다. 그러시고는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십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승복합니다. 자신을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토마스의 모습이 없는지 묵상하며 미사를 봉헌합시다.

☆☆☆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토마스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대답했다 (요한 20,19-31)


☆☆☆

말씀의 초대


초대 교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쳤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었던 것이다. 부활의 연장으로 재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제1독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야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다.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라야 세상을 이긴 사람이다(제2독서). 토마스의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의심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자신을 위해 한 번 더 발현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다. 부활은 깨달음이며 은총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부활하신 주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는 밖에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 숨어 있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찬 토마스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합니다. 못 믿겠다고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토마스는 스승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살아나실 거라면 왜 죽어야 하셨는가? ‘죽음의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부활하셨다는 동료들의 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지나친 발언이었습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십니다. 순전히 토마스를 위한 발현입니다. 그러시고는 말씀하십니다.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 말씀에 토마스는 엎드립니다. 눈으로 확인했기에 엎드린 것은 아닙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자기를 위해 ‘한 번 더’ 나타나신 스승님의 애정에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이론은, 사람을 설득할 수는 있어도 승복시키지는 못합니다. 사랑과 애정만이 사람을 감동시키고 승복하게 합니다. 이후 토마스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는 결코 의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

아름다운 일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무 탓 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요셉이 자기를 웅덩이에 처넣고 미디안 상인에 팔아 버린 형제들을 이집트 궁궐에서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눈물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도 용기를 내어 우리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이웃을 용서합시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 선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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