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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박병규 신부님의 요한 묵시록 해설 제10강/ 복음서로서의 요한 묵시록1 강의록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3-09-28 조회수467 추천수1 반대(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신부님 말씀이 좀 빨라서 강의록 분량이 좀 많습니다. 그러나 꼼꼼하게 읽어 보시면

감탄사가 나오실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제10강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 1

 

찬미 예수님!

예, 잘 지내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참 많은 어떤 내용들을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살펴 봤는데요. 

불행히도 아직까지 요한 묵시록에 들어가서 쭉 읽어가는 것은 아직 안 했습니다.

 

그래서 읽어가기 전에 요한 묵시록은 이러한 관점으로 이러한 어떤 기본적인 자세를

가지고 접근을 해야 된다라는 그런 차원을 하나하나씩 말씀을 드립니다. 

요것을 두 가지로만 일단 정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바라보는 요 두 가지 관점, 이 관점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요한 묵시록은 이런 느낌으로 읽어야 됩니다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 이 시간에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관점이 뭔가? 우리가 두 가지 먼저 정리를 한번

하고 오늘 이야기로 연결해서 한번 보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계속해서 봤던 것.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강조했던 것.

첫 번째가 부활하신 뭐 예수님이라고 합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내가 어떻게

만나느냐의 문제가 요한 묵시록의 관심사였다. 이 부활, 그래서 내가 곧 부활할 수

있다.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그 기쁨 안에서 내가

살아야겠다. 그런 희망을 살아가야 되겠다.

 

이 부활은 어떤 의미에서 이 지상적인 어떤 삶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줍니다.

하느님과 일치하고 하느님께 온전히 일치해서 그런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살아

가는 것.

 

* 현실(세상)이 어떻든 간에 내가 그러한 기쁨을 살아간다면 세상에 어떠한 어려움

이나 슬픔도 나는 꿋꿋이 이겨낼 수 있다. 그런 신앙에 대한 격려의 메세지는 부활

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책이 요한 묵시록이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 가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그렇습니다. 이거 뭐 나쁘다 나쁘다만

자꾸 이야기하면 계속 나쁜 거구요. 아니다. 이 정도면 됐다. 더 기쁘게 살아가자.

부활, 희망을 가지고 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자. 내가 부활할 수 있다. 부활하신

그분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어떤 격려의 메세지, 위로의 메세지를 내가 가지고 살아

간다면 부활의 삶을 지금 현실에서 살아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래서 지금 삶의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였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이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들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라

고 자꾸 이야기를 해 주시는 그런 말들을 우리가 많이 보게 되는데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입니다.

 

자, 구약의 예언서를 이야기하면서 구약의 어떤 예언서 개념을 제가 말씀드렸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에 뭐 기본적인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지금"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 그것을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요한 묵시록의 어떤 관점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

1번과 연결됩니다.

 

* 1. 부활하신 예수님

   2. 예언서 요한 묵시록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부활을 우리에게 보여 준 자리예요. 그럼 내가 이 삶의

조건이 좀 힘들고 어렵고 이렇다고 해서 이것을 "아, 아니구나! 절망이구나! 슬픔이구나!

에이, 모르겠다! 치워버려라!" 이러구 나가버리면 지금 이 자리에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걷어차는 것이지요. 그냥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

그래 살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의 제일 끝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가 곧 가겠다!" 그러니까 "주 예수여 오소서!"

아직까지는 만나지는 않았는데 가겠다 약속을...

 

지금 이 자리에 들려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 약속을 내가 간절히 바라면서

"네, 당신이 오시기 전까지 열심히 살고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살아가는 삶의 위로,

희망, 이것을 요한 묵시록을 통해서 봐야 된다라고, 요 두 가지 관점으로 제가

이때까지 다 정리를 해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봐야 될 것은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입니다.

복음이 뭡니까? 기쁜 소식입니다.

예, 뭐가 기쁘세요?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 복음이 흔히 우리가 기쁘다 뭐 이런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기쁨의 근원이 어디인가?

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 그래서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

왜 우리가 복음으로 느껴야 되나? 기쁜 소식으로 느껴야 되나?
어떤 의미에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처절한 이 기쁨이라고.

모순되는 개념이지마는.

 

내가 삶의 어려움을 딛고 일어 섰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어떤 기쁨, 복음.

그런 어떤 말씀으로서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접해야 되겠다.

얼마전에 제가 책을, 책을 아직 내용을 다 아직 못 읽었습니다.

이거 사야지. 근데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가지고.

이 책의 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 이 책 사야 되겠구나 했는데 제목이

happiness in hard time : 어려운 시간 안에서의 행복입니다.

 

이 말 마디가 완전히 제가 요한 묵시록을 공부했습니다마는 요한 묵시록을 완전히

정리하는 책이드리구요. 그 책 안의 내용은 뭐 구체적으로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마는

그 제목을 보면 그 어떠한 어려운 삶의 정말 갖가지 고초를 다 겪은 그 어떤 어려움의

절정에서 느끼는 행복? 정말 행복스럽게 살아가야 되겠다라는 그런 행복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는 것.

 

정말 저 기쁨과 세상적인 화려함과 그러한 어떤 세상에서 행복이라고 추구하는 것.

그런 것을 그 안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일수록 찾아낼 수 있는 행복의

지혜. 그런 것들을 그 책에 담고 있다. 그래서 책 제목이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어려운 시기 속에, 여려운 시기 안에서의 행복. 그런 것들을 보게 됩니다.

 

간혹 서점가에서 책을 보자고 이렇게 보면, 요즘은 많은 책들이 '끌어 당김의 법칙'

이라는 그런 어떤 이야기를 많이 하는 책들을 보면, 끌어 당김이 뭡니까?

예컨대 돈이든 사람이든 쉽게 얘기해서, 내 통장에 얼마 있다고 계속 내가 생각하고

내가 내 인생 안으로 끌어 당기는, 자꾸 나를 쇠뇌를 하게 되면 언젠가는 통장에 돈

들어온다라는 개념. 그런 책들도 있어요. 또 많이 팔려요. 베스트 셀러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을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이 사람하고 가까이 하고

싶다고 마음으로 계속 끌어 당기면 온답니다. 자, 그런데 저는 매일 같이 성무일도

하고 매일같이 예수님 오셔 가지고... 막 끌어 당기는데 한번도 왜 안 오시는 거예요.

^^*~~~

 

예, 끌어 당김의 법칙이 내 중심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이

사람 관계가 아니고 그것이 세상 사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 추구하게 끔 만들어 주고,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이 나 중심적으로

자꾸만 생각하게 끔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오늘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을 볼려고 하는데 행복하다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 촛점을 맞추어 주어야 되는

것인지, 나 중심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인지...

 

예, 거기에 대해서 한번 우리가 이 시간 동안 깊이 한번 고민해 봐야 되겠다라는

생각입니다. 예, 왜 복음으로서 우리가 요한 묵시록을 제가 잡았냐 하면,

요한 묵시록은 "행복하여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1장 3절부터.

이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이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 행복하다.

요 단어를 하나 하나 찾아보면요. 일곱 개가 나옵니다.

 

자, 지난 시간에 우리가 숫자와 색깔을 가지고 공부 했습니다. 자 7은 충만, 완전

* 숫자 7: 충만, 완전을 의미

 

왜? 우리가 유다 전통을 생각했죠? 3은 어떤 신적인 하느님의 영역이고 4는 세상.

*숫자 3: 신적(하느님) 영역. 숫자 4: 세상

 

그러므로 숫자 7은 하늘과 땅이 온전히 만나는 충만한 숫자다. 그러니까 행복하여라

라는 단어를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아주 이렇게 세심하게 7을 한번에 요렇게 딱 놓고

일곱 개를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띄엄 띄엄 띄엄 놓고 전반적으로 전체적으로 걸쳐서

행복하여라를 요소 요소에 배치시키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이 책 전체가 행복 찾기예요. 행복인 거예요. 행복을 위해서 그걸 염두에

뒀던 거예요. 중간 중간에 뭐 희안한 재앙은 들어 갔지만, 결국에 이 책은 행복하라고

너희들에게 준다는 의미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1장 3절은 책의 서론 부분입니다. 서론에서 이 말씀, 이 말씀이 어떤 말씀

인데요? 이 말씀이 이 책의 전체죠. 이 글 전체를 말합니다. 이 전체가 낭독하는 이와

듣고 지키는 이들은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일곱 개의 이 행복을 구절 구절 하나 하나 보면서 어떤 의미가 행복한 것인지

진정 행복한 것인지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1장 3절에 보면,

 

* 묵시 1,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자, 문제는 이 예언의 말씀입니다. 아까 두 번째에서 제가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

이라고 했죠? 예언서로서의 요한 묵시록에서 제일 중요한 게 "지금"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읽혀져야 될, 낭독 되어져야 될 말씀이라는 거죠.

 

그리고 예언서는 지금 이 자리에 들려지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하느님의 메세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예언의 말씀이 요한 묵시록 전체를 감고

있는, 감싸고 있는 모든 이 말씀들은 정말로 저 미래에 펼쳐질 이야기나 혹은 과거에

벌어질 이야기나 혹은 잘못된 이들이 뭐 어떻게 될 것이다. 혹은 잘 살면 이렇게

상을 받을 것이다라는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말씀을 들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메세지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된다? 낭독하고, 듣고, 경청하고 동시에 지켜라.

'지키다'라는 말씀 이것은 단순히 내가 여기 이 성경을 딱 들고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훔쳐 갈까 싶어서 딱 가지고 있고 먼지가 쌓이든 어쨌든 간에 가만히

지켜 보고 있으면, 아, 말씀을 지키는 거구나. 하느님께서 주신 메세지를. 그죠?

 

뭐 연애 편지도 아니고. 예, 군대 생활 할 때 제가 예전에 가톨릭 신문하고 뭐 이런 거

희망의 나눔자리, 뭐 옛날에 있었던 잡지, 그 잡지를 군인 신학생들한테는 공짜로 보내

주셨는데 얼마나 얼마나 이게 너무나 값진 건지 계속 읽고, 읽고 하루에도 수십 번

건빵 주머니에 접어서 넣어서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이것이 지키는 개념과 조금 연결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계속 접하고, 계속 읽고, 듣고자 노력하는 것.

예, 그래서 시편 1장 2절을 보면,

 

* 시편 1,2: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밤낮으로 주님의 법 되새긴다고 요즘은 되어 있습니다. 예전 공동번역에서 보면

묵상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제가 될 때 서품성구 있죠?
아,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우리 신부님들이 다 하나씩 정합니다.

저는 시편 1,2, 밤낮 주님의 법 묵상하도다.

 

예, 지나고 나서 살면 살수록 아, 괜히 정했구나.^^*~~~ 안 되요.

처음에는 막 열정을 가지고 밤낮으로 그냥 묵상할려고 했는데.

예, 밤낮으로 이게 밤낮이 조금 힘든 거 같습니다. 낮밤이 바뀌는 거 이거 좀... ^^*~~

그래서 밤에는 안 되고 낮에라도 좀 충실히 할려고 했지마는 사실 이 일에 쫓긴다는

핑게로 이렇게 자주 묵상 못해요.

 

그러니까 요기 묵상하도다. 되새기도다라고 할 때 그 동사가 뭐냐하면 재잘거리다.

자꾸 이렇게 되뇌이다. 요즘 우리 젊은 층들도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하시지만

트위터 있지요? 트위터,  새가 재잘거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법을,

이 율법을,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내가 옹얼옹얼 거리는 거예요.

 

예, 얼마나 귀여워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하느님의 말씀을 입 안에서 계속 중얼중얼 거리는 것.

예, 요즘 제 조카가 태어난 지 지금 두 달 조금 지났는데 옹알이를 시작했어요.

귀여워 죽겠어요. 이뻐 죽겠어요. ^^*~~~

 

예, 우리 신자들이 이 하느님의 말씀이 옹아리가 되면 너무너무 예쁠 것 같애요.

그런데 그걸로, 그것으로 끝이나면 안 됩니다. 지킨다는 의미에는 내가 이렇게

말씀과 하나가 되는, 그래서 옹알옹알 거리면서 하나가 되는 것도 있지마는

동시에 거기에는 실천적인 면이 따릅니다.

 

예언서의 예언자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왜 메세지를 던져 줬는대요?

너희들 그렇게 살아라고. 말씀을 지킨다라는 표현은 내가 그 말씀을 살아내야

되는 것이예요. 내가 중얼중얼 거리는 말씀을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뭔가를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 제일 끝에는 내가 너희들에게 상을 줄 때, 보상을 할 때,

심판을 할 때 너희들이 한 행실대로 하겠다. 말씀 백날 읽고 하면 뭐합니까?
예,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야고보서에도 되어 있죠? 뭐라고 돼 있습니까?

행동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예, 간혹 어떤 이 성경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도덕군자의 훈화 말씀 정도로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필사를 하십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필사를

하시고 그냥 읽으시고. 다 좋은데 그것으로 끝나버리면 성경을 성경으로 받아

들이는 모습은 아니죠.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분명히 어떠한 모습을 드러내는 몸짓이 있어야 되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 그래서 첫 번째, 우리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나를 떠나야

되요. 어려워요.

 

말씀을 자꾸 중얼중얼 되새기고, 묵상하고 해서 내가 말씀으로 자꾸 가고자 노력을

해야 돼요. 이것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가지고 또 내가 뭔가를 드러내야 되요.

몸으로 뭔가를 표현해야 되요. 행복입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몇 억 들어와라.

몇 억 들어와라. 가만히 있으면서 저 사람 나에게 와라. 나에게 와라. 나에게 뭐

갖다 달라. 이런 식의 요즘 세상에서 말하는 끌어 당김의 법칙. 여기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닌 나의 고생은 사라진거예요.

 

그러나 요한 묵시록에서 말하는 것은, 내가 조금 고생을 해야 되요. 왜?

나와 다른 말씀을 내가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는데 이거 낯설은 거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지금 제가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마는 사실 다른 사람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더 힘들거든요. 말하는 사람보다.

 

왜? 그 말이 뭘까? 내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쉽지. 다른 사람 생각을

이해 할려고 듣고 있는 게 더 피곤해요. 그래서 여러분들 정말 피곤하시겠어요.

집에서 시청 하시는 분들도. 그러니까 이러한 자기 것을 말하기에 앞서서 뭔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내가 표현해 낸다는 것. 이거 되게

어려운 것입니다.

 

이게,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요한 묵시록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 다음 것 읽어 보면서 우리가 계속해서 이 관점으로 한번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 묵시록 14장 13절에 어떤 말씀이 있냐하면,

 

* 묵시 14,13: "나는 또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자, 이 구절에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아주 유심히 봐야 되는 것이, 죽는 이는 행복하다.

죽음이 행복이다. 이거 받아들이기가 조금 힘들죠? 예, 죽고 싶으세요? 뭐 어르신들

"고마, 아이고 내가 죽어야지, 죽어야지." 뭐 그런 말씀 많이 하시던데 사실 죽고 싶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죠?

 

지금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적인, 이 육체적인 아, 세상사 끝났구나라는

그런 식의 관점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요

단순히 우리가 육체적인 아. 생명이 꼴까닥 했구나라는 관점이 아니라, 주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내 것을 포기하고, 내 것을 접는 것.

그 모든 것을 죽음이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 주님 안에서 죽음: 주님(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내 것을

                             포기하고 내 것을 접는 모든 것.

 

예, 요한 묵시록은 분명히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영성적인 차원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동시에 현실적인 어려움을 영성적인 힘으로 극복하고

현실적으로 잘 살아 내게끔 하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 죽는다라는 것은 내 목숨 바쳐서 정말 피를 흘리는

순교도 할 수 있겠지마는 순교의 의미가 뭡니까? 순교의 의미가? 증언 한다는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 일상의 삶

안에서, 현실의 삶 안에서 증언해 낼 때 이거, 순교자가 되는 것이지요.

 

힘들 수가 있는 것이예요. 왜 아니 힘들겠어요.

자, 아주머니들 모여서 뭐 곗돈 뭐 뭐가지고 다 단풍놀이다. 무슨 놀이다.

여름에 어디 놀러 가는데 주일이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놀러 가셔야죠?

아닙니까? 예, 가실 수 있지요. 가실 수 있는데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신앙적인

가치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완전히 세상에 푹 빠져

가지고 "아이고 하느님 모르겠다. 나는 모르겠으니까!" 이 관점으로.

 

요기만, 세상의 것이 좋아서 거기에 막 느끼고 기뻐하고 요기서만 막 헤메고 있는

모습 자체가 이건 주님 안에서, 이것은 주님과는 상관 없는 세상에 푹 빠져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거기에서 "아, 하느님의 뜻은 뭘까?

주님은 여기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생각해 보는 것.

 

이것은 일차적으로 내가 끌리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될 것은 주님 안에서 죽는다느 말을 가지고

가져야 될 것은, 이것은 이런 상황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이런 것을 던져 주셨을까? 그래서 이것도 매 순간에 하느님, 예수님이라는

그 단어, 그 이름을 부르는 그 연습을 해야 되요.

 

내가 그냥 막 내가 희생하면 되지, 극기하면 되지, 아, 내가 희생했다.

예컨대 우리 성당에서 봉사활동 많이 합니다. 그죠?

"아유, 내 좋은 보람찬 일을 했다."라고 생각하시면 이거는 성당에서 백날 일해

놓고도 주님 안에서 죽는 행동 아닙니다. 자기의 어떤 무엇을 채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 주님 안에서 죽음이 아니예요. 자기의 영광의 어떤 채움이죠.

 

그래서 "아, 주님! 이 시간 당신께 봉헌합니다."

굳이 봉사가서 거창하게 남 돕고 안 하셔도 돼요. 뭐 형제님들 같은 경우는 직장에서

사소한 것 하나에서 내 몸 하나 조금만 움직이면 남이 혹은 도움이 되는 그런 일.

"주님, 이거 당신을 위해서 제가 조금 희생합니다." 이렇게 속으로 기도 드리며

행동하는 것. 이거 다 주님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는 것.  우리의 의미에서

하늘 나라에 보화 쌓는 것은 뭐냐? 예, 정말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것. 내가 내 관점으로 좋은 것,

나쁜 것 선택해서 "나 훌륭한 일을 했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주님 안에서 죽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행복한가?

 

내 것을 자꾸 채워가다 보면요. 내가  싫은 것은 어느 사이 내 주위에 없어요.

그럼 내가 스스로 틀을, 장벽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깨야 되요.

그래서 내가 약간 낯설고, 힘들고 약간 좀 부담스러운 것들,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갈 때 기쁨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뭔가 행복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아, 내가 나의 틀을 하나 깼구나!" 깨는 것과 동시에 하느님께 내가 봉헌했구나.

나를 떠나는. 조금만 조금만 해서 떠나는 어떤 그러한 노력, 그러한 노력을 해

나갈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떠나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가 행복이 아니라 자기 만족에 취하다가 나중에

되돌아보면 아, 나중에는 어떤 뭔가 주님이 함께 하는 삶이 아니었고, 나만을 위한,

나를 꾸미기 위한 그런 어떤 모습이었구나라고 나오는 많은 책들이 행복에 관한 책들이

많이 있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많은데 그 많은 것들이 나를 꾸미고, 나를 어떻게

예쁘게 가꾸어 나가는 식으로 그렇게 많은 글들이 적혀져 있습니다.

 

오히려 나를 버리십시오. 그래서 법정 스님이 무소유와 같은 그런 어떤 정신 이런 것.

김수환 추기경님의 어떤 바보라는 그런 개념.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의 참된

어떤 행복의 조건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요한 묵시록에도 등장을 하는

것이지요. 자,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보면, 16장 15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묵시 15,16: "보라, 내가 도둑처럼 간다."

 

이 도둑처럼 온다라는 말은 우라가 복음서에서도 많이 봅니다.

이왕 오실 꺼 좀 시끄럽게 좀 오시지. 왜 도둑처럼 간다고 이렇게 표현 하셨을까?

 

*묵시 16,15: 깨어 있으며서 제 옷을 갖추어 놓아, 알몸으로 돌아다니며

                   부끄러운 곳을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

 

예, 우리 인간적으로 봐서 정신나간 사람이다. 그죠? 경찰이 와서 바로 잡아 갈...

알몸으로 돌아다니면서 부끄러운 곳을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

자, 도둑처럼 간다. 그리고 제 옷을 갖추어 놓아 알몸으로 돌아다니며 부끄러운 곳을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둑처럼 간다는 개념에 대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도둑처럼 올까요?
도둑이 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모르죠? 자, 도둑 맞는, 소위

도둑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일상의 삶을 어떻게?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뭐 획기적으로 뭔가 도둑이 오니까 대비하고 있고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는말이죠. 똑같이 그렇게 자기의 삶을 평상시에 살아간다.

 

이때 하느님이 오시고,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이때 참된 행복이 온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이 삶이 바꾸이졌을 때 완전히
천지개벽해서 나의 어려움이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의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때에 행복이 왔다고 칩시다. 그것이 일상화가 됐을 때 그게 행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행복은 그래서 늘 변하지 않는 어떤 의미에서 내 일상의 삶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참된 행복이다. 그래서 제 옷을 갖추어 입고 그죠? 갖추어 입니다?

우리 요한 묵시록에 어떠한 이야기입니까? 자기 겉옷을 어린양의 피에 빠는.

이것을 단순히 정말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라. 이런 소리가 아니죠?

십자가에 못 박혀라라는 소리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

 

*자기의 삶 안에서 자기의 삶의 십자가를 지고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늘

기다릴 줄 아는 사람, 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할 줄 아는 사람, 그것이 자기 삶이

되어 있는 사람, 이 사람에게 흰 겉옷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도둑처럼 오든 뭐처럼 오든, 누가 오든 안 오든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그런 일상의 삶, 이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행복

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뭔가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까 계속 반복해서 말씀드렸던 끌어 당김의 법칙은 나와 다른 무엇?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데서 옵니다. 기대를 하면 실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거기에서 우리가 행복을 찾아야 됩니다.

 

내가 내 삶을 안 보고 어떤 보기 싫은 부분 그냥 덮어두고 요걸 자꾸 바꾸어 나갈려는

것이 우리 세상의 행복론입니다. 자꾸 덮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직시하십시오.

오리혀 나쁜 것이고 내가 보기 싫은 것이고, 어려운 것이고, 내가 부족하다 싶은

것을 어렵지마는 내가 또 다시 상처받지마는 그거를 계속 보십시오.

 

그 안에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그 안에서 나와 함께 아파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괜히 나 아닌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 그것은 행복이 아니다라고 우리가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19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묵시 19,19: 또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천사가  또 이어서 "이 말씀은 참된 말씀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자, 어린양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예수 그리스도.

혼인잔치. 이거는 뭐 구약부터 해서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혼인이 뭡니까? 만남, 일치입니다. 우리 호세아 예언서는 잘 아시죠?

호세아 예언서는 일치 못한 것을, 부부가 일치하지 못한 것을, 사랑의 관계가 아닌

것을 어떻게? 창녀로 표현해 버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등진 이스라엘 백성을

창녀와 같은 것으로 표현을 했어요.

 

그런데 혼인, 부부, 사랑, 이것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있는 그런 거.

하느님과 일치의 삶이 곧 행복의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자, 이것도 나 중심적이 아니죠. 내가 무엇을 채우는 행복이 아니죠.

하느님께 나아가야 되는 것이죠.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이 무엇일까?

어떤 삶일까? 이것을 우리가 한번 보겠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해 있는 것을 머리 속에 딱 떠올리면? 에덴 동산을 떠 올릴 수가 있을

꺼에요. 에덴 동산에. 에덴 동산에 우리가 보면, 하느님께서 거니시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시어 그 한가운데에 딱 두시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모든 나무들을

딱 두시고,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모든 나무들을 이렇게 다 먹고 관리하고  돌볼 수

있는 것을 우리가 하고 있고, 하느님과 뭔가 어울려 가고 있습니다.

 

어울려 살아가는 그곳에 하느님께서 딱 하나의 금기를 두셨는 게 뭐냐?

"선악을 알게 하는 이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마라." 선악을 알게 한다라는 것은?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열매가

있으면 얼마나 많이 먹고 싶겠습니까? 그죠?

 

제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그러나 그런 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하느님의 영역, 또 인간은 하느님의 영역을 제외한 다른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나와 내가 철저하게 어떤 구별된. 갈라진 것이 아니죠. 에덴 동산의 한 장소에 같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갈라짐이 아닌 서로 구별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예, 그런 것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과의 일치의 행복을 찾아낼 수 있어야 된다.

하느님은 우리와 다르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와 혼인관계, 일치의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일치는 획일, 전체, 집단주의가 아니죠. 일치라는 건 너와 내가

다름을 배려하고 인정하는 그 안에서 우리가 일치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너무나 쉽게 표현되는 말이지마는 너무 어려운 말이 바로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어떤 행복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상의 수난과 이 지상에서의 어떠한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어요. '우리가 똑같이 살아라.'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당신의 삶을 우리의 삶 안에서 증언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증언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일치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살아가신 그 모습을 똑같이 재현해 낼 수는 없어요.

똑같이 재현한다고 해가지고 얼마전에 정말 불행한 사건을 우리가 보게 되었습니다.

예, 십자가 상의 죽음을 스스로 재현할려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죠?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내가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삶을 구별되게 배려하신다는 말씀이죠. 에덴 동산을 떠 올리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영역이 있고, 인간의 영역이 있다는 말이죠. 그 인간이 우리의 각자 교유한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 정신을 구현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혼인 관계입니다. 별거하고 있는 부부 같이 살아가는 부부다. 각자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예,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우리의 겉옷을 빨아야 되요. 우리가 직접 증인으로 나서서 정말

목숨이 다할 때까지 증언의 삶을 우리의 삶 안에서 살아 내어야 되요. 그래서 6장에

제단에 있는 영혼들이 외칩니다. 우리의 피의 복수를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묵시 6,10: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시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그 말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하면, 내 이만큼 증언하며 살았다. 당신의 말씀

때문에 이렇게 살았다. 그리고 11장에 나타나는 두 증인,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증언하며 살았다. 세상은 그러나 나를 죽였다. 그래도 사흘 반 후에 다시

이렇게 살리시는 그런 모습.

 

*묵시 11,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내가 내 삶을 내가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나중에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인 것이지요. 내 삶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내 삶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는다면 이 행복 못 누립니다.

 

내가 내 삶 안에서 뭔가 해 내야 하는데 아, 이삶 말고, 아, 저거 화려해 보이네.

아, 저거 화려해 보이는구나. 자꾸 갖다가 쌓아 놓으면 내꺼는 어디에 있는지 찾지도

못해요. 그리되면 절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행복을 내가 경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다음 구절을 우리가 보면, 20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묵시 20,6: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고 또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이들에 대해서는 두 번째 죽음이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제가 되어, 그분과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입니다.

 

자,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고 또 거룩한 사람이다. 자, 우리가 지난

시간에 우리 상징을 봤지요? 첫 번째 뭐라고 그랬습니까? 유일성이라고 말했고

유일하게 하느님과 일치 시켜주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예, 거기서 첫 번째 우리가

1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봤습니다.

 

첫 번째 부활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죠? 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고 또 거룩하다. 예수님의 부활을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두 번째 죽음이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두 번째 죽음이 뭐냐하면, 영성적인 정신적인 죽음이예요.

우리가 세상적인 논리에 "아이구, 이게 좋구나! 저게 좋구나!" 이렇게 막 행복을

찾아 나서다 보면 예, 정신이 이렇게 황폐해져 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 쾌락에 빠져서 살면 그것이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구나! 우리가 반성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세상 것은 무조건 나쁜 것. 천상적인 것, 하느님은 무조건 좋은 것.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세상 안에서 내가 신앙인으로서 신앙의

그런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그럼 세상이 얼마나 즐길 게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신앙적인 가치로 누릴 얼마나 큰 행복들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많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신앙적인 어떤 신념을 다 없애 버리고 내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여기 있다가 저기 있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죽음이라는 것이지요.

 

부활에 대한 그 기쁨으로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 아무리 환경이 나쁘더라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 안에서 참된 행복을 느끼는 것이지 아,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내가 정신적인 죽음, 영성적인 죽음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 지향을 해야 되지 않는가?  

그래서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바로 부활을 사는 것이다라고

이 구절에서 우리가 볼 수 있겠습니다.

 

* 요한 묵시록이 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바로 부활을 사는 것이다.

 

자, 22장 7절에 보면, 여섯  번째로

* 묵시 22,7: "보라, 내가 곧 간다.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거 우리가 봤죠? 1장 3절에서 봤습니다. 자, 첫 번째 서론에서 딱 말했고,

두 번째 지금 결론 부분에서 똑같은 말이 반복 됩니다.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자 지키는 사람에서 '지키다'라는 동사는 보면, 내가 말씀으로 체화되고, 말씀으로

하나가 되고, 말씀을 내 몸으로 표현해 내는 곧 살아내는 것이 지키다라는 것이

었습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행복하다.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요것은 예, 너무 쉬운 말이구요. 22장 14절 마지막으로

 

*묵시 22,14: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

 

요 말은 7장에서 나온 말입니다. 셀 수 없는 군중들, 어좌 앞에 구원을 외치는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어린양 앞에서 정말 기쁨을 노래하는 그들이 한 일, 곧 겉옷을 빨고

있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마는 겉옷을 빨고 큰 환난에서 이미 겪고 온 이들이 아니라

현재 분사가 사용됐거든요. 지금 큰 환난에서 지금 걸어오고 있는,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 겉옷을 빨고 있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이 동시에 구원을,

기쁨을 노래합니다.

 

*겉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 환난 중에 있는 이들로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사람들

 

이 말이 뭡니까? 지금 슬퍼 죽겠는데, 힘들어 죽겠는데, 지금 거기서 구원을 노래해요.

[Happinss in hard time] 예, 책의 제목인데 [어려운 시기 안에서 발견되는 행복]

 

모르겠습니다. 이게 같이 연결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라는 게 있죠? 자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그것을

알기 때문에 서로가 도와 주며 서로 행복해 하는.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긴 겉옷을 깨끗이 빤다고 해서 다 빨아가지고 "이제는 다 어려움이 지나갔구나.

이제 새 세상이, 새 행복이 왔구나!" 그런 개념이 아니라 어떠한 삶이든 이제 흔들리지

마십시오. 흔들려 가지고 뭐 이거 어렵고, 이거 기쁨을 찾아야지. 아, 행복할 날이

오겠지. 볕들 날이 오겠지. 이 개념이 아니라.

 

지금 매 순간순간이 우리가 행복을 추구해야 될 시간이고, 매 순간이 부활을 살아야

될 시간이고, 매 순간이 기쁨이고, 동시에 살아야 될 시간이고, 매 순간이 기쁨이고,

동시에 매 순간이 어려울 수도 있는 거예요.

 

어려움과 기쁨을 이분법적으로, 이원론적으로 나누어서 생각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 묵시 22,14: 그들은 생명 나무의 열맬르 먹는 권한을 받고,

                    성문을 지나 그 도성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자, 생명나무의 열매가 어디서 등장하는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두 나무가

있는데 생명나무는 신의 영역이죠? 그것을 먹는 권한을 받아요. 이거는 에덴 동산

보다 더한 거죠? 생명나무를 먹어요. 그 행복한 이들은 하느님과 일치해 살아가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편하게, 행복하게 살기가 궁극적

목적입니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것입니까? 그러면 자, 조금만 힙냅시다. 조금만.

길어봐야 70년, 근력이 좋아서야 80년인데, 요즘은 의학이 조금 발달했기 때문에

길어봐야 한 80년, 근력이 좋아서 90년 이럴까요? 예, 바꿀까요?

 

조금만 우리가 지금 이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 보라는 게 아니라 이 삶은 내가 정말로

영원한 행복을 지금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험장이고, 한번 해 볼만한, 도전할 수 있는

그런 완전히 재미있는 곳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매사에 무엇이든 하던 간에 옳고

그름을. 아, 이건 싫어, 이건 좋아.!" 이것을 따지기 전에 어떤 게 나에게 주어지던

간에 열심히 한번 해 보십시오. 열심히 굳건히, 힘을 다해서.

 

취미 생활도 좋고, 뭐 가정 생활, 집안 일도 좋고, 직장 일도 좋고, 이것을 열심히

살아갈 때, 열심히 살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희망과 기쁨을 얻어 누리는 이 행복은

되게 더딥니다. 한방에 몇 억씩 들어와 가지고 나를 소위 정말로 환장하게 하는

기쁨이 아니라 그거는 즉시 사라지는 기쁨이지마는 요거는 더디지마는 참 뿌듯한

어떤 행복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가

행복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일곱 개 구절을 우리가 살펴 보면서 한번 정리는 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 행복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이라고 했습니다.

이 행복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행복과 거의 일맥상통하다. 복음서에서 나오는

"행복하여라." 이거 어디서 나옵니까? 

 

* 요한 묵시록의 행복은 마태오 복음 5장의 진복팔단에 나오는 행복과 의미가

   비슷하다.

 

마태오 복음 5장에 예수께서 산으로 올라가셔서 산상 설교를 하시는 진복팔단에

나오죠? 그런데 거기서 하나 강조해 드리고 싶은 부분이 뭐 웃게 될 것이다.

뭐 하게 될 것이다. 다 미래형으로 쓰이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향복하다는 걸

딱 두 개가 현실에 행복한 사람이고 바로 하늘 나라가 지금 그들의 것이다라고

현재형으로 쓰이는 두 구절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첫 번째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지금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두 번째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지금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마태 5,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박해 받는데 뭐가 하늘 나라가 그렇게 와 있다고 기쁨을 느끼겠습니까?

분명히 복음서에서 말하는 행복이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과 뭔가 다르다라는

관점을 우리가 가지게 됩니다. 내가 확실하게 신념을 가지고 옳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을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된다. 그것이 비록 박해가 오고

다른 사람이 안 좋은 말을 할지라도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굳건히 지키는 것. 여기서 행복을 찾아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행복이죠.

내가 원하는, 내가 찾고자 하는 안에서의 행복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서의 행복.

 

* 요한 묵시록의 행복: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

 

그래서 나를 떠나야 됩니다. 나를 떠나서 새로운 것을 찾아야 됩니다.

그 새로운 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는 것. 거기서 행복을 느껴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면, 1장 3절에서 그리고 22장 7절에서 보면,

이 책 전체의 서론과 결론이라고 했습니다. 그죠? 이 글을, 예언의 말씀을

 

여기서 우리는 이 요한 묵시록이 당시에 요한 묵시록 실제 독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기가 지나고 어떠한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이 말씀을 접하는 모든

이에게 행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행복: 묵시 1,3과 묵시 22,7은 요한 묵시록의 독자의 세계를

                                 무한대로 이끌어 낸다.

 

시청자 여러분도 그렇고, 여기 앉아 계신 분들도 그렇고 각각의 고유한 자기의 삶은

다 다양하고 다릅니다. 이 다른 것 안에서 요한 묵시록은 각각 고유한 행복을

느끼게끔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현실의 삶을 부활하신 그분과 열심히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고유한 행복이라는 것. 그것이 모든 독자를 확대해 놓고 있는 것이죠.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이 말씀 안에 오는 이를 환영한다. 행복에로 모든 이를

초대한다라는 것이 요한 묵시록의 행복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파스카적인 행복론입니다. 파스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포기하고 나를 이렇게 제대로 보면서 내 의지를 내가, 나만이 하고 싶은 것을 접고,

누구를 위해서 하고 싶은 것? 크게는 예수님을 위해서하고 싶은 것.

동시에 나의 가정, 나의 가족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 우리 이웃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 나를 뛰어 넘는 것. 건너가는 파스카적인 행복론을 이야기합니다.

 

*요한 묵시록의 행복: 파스카적 채색에 깃든 행복(행복하게 살기 위해 죽는다!)

 

열정적으로 한번 다른 이를 위해서 한번 살아보라는 것이죠. 그런 행복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행복론은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행복: 독자의 '적극적 행위'를 전제로 하는 행복

 

마음 속으로만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고, 내가 살아 내는 것. 그래서 요한 묵시록에서

뭐 이래 뜬금 없는 천상 이야기, 징벌의 이야기. 막 이런 이야기들이 펼쳐지는데

뭐를 실천해야 되는가? 이게 참 감이 안 올때가 있어요. 안 올 때가 있는데 그것은

요한 묵시록을 통해서 뭔가를 찾아 낼려고 하지 마시고, 요한 묵시록이 적극적인

행위를 하라고 했으면 한번 옆을 보십시오.

 

분명히 도와 줘야 될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이 필요한,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그 기쁨을 줄 수 있는 분들이 분명히 보입니다.

예, 그것을 찾아 나서라는 것이지요. 왜 이런 행복론, 이 파스카적인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이든,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이 어떠한 이 행복론.

 

이것은 왜 그런가? 제가 정리할 때 늘 사용하는 것이 사람 인자입니다.

사람 인자, 人 :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에 의해서 서 있을 수 있는 이것이 사람입니다.

 

구약 성경 첫 번째 시작하는 하와가 만들어질 때, 알맞은 협력자로서 이름입니다.

협력자라고 쓰이는 그 단어가 뭐냐하면, 히브리 말로 '도움'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도와주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인 행동, 그것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한 누구에게 우리가 도와 줄려는 맘으로 다가서고 있는 것인지,

아우, 저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얻지?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을 어떤 도구로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인간 다울려면, 참다운 어떤 인간의 삶을 살아가려면,

'도움' 다른 사람 없이는 나는 존재하지 못하는구나!"라는 그런 것.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없이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구나!

그분의 삶을 내가 살아야겠구나.

 

내가 사는 것이 곧 이웃을 위해서 사는 것이구나라는 공동체적인 생각,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얻어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늘 건너가고

건너가서 정말 타인 지향적인 어떤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두가 기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 위주로 살아가는 그 사람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입니다.

내 것이 안 받아들여지고, 내 것이 원하는 대로 안 될 때, 사람은 폭력적이 되고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이죠. 우리는 생명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죠?

부활하신 그분과 더불어서 영원한 생명, 지금부터 우리 생명 안에서 기쁨 누리시고

행복 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 예고: 복음으로서의 요한 묵시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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