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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자연적 생명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障碍)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3-12-19 조회수463 추천수1 반대(0) 신고

초자연적 생명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障碍)

 

영적 음식에
독소를 넣는 것을
 수덕학적으로
유혹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유혹을 받아
영혼의 병을 만드는 것을
 죄라 하며 그 병이
치명적일 때
대죄라고 합니다.
 
연적인 생명 예를
들어 초목이 자라는 과정에서
많은 잡초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격고 초목은
 자라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초자연적인
생명도 사욕과 세속과
사탄으로부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아
영혼을 유혹하고 방해하며
내적 평화를 어지럽히고
 죄에 빠뜨리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영혼이
유혹을 받을 때
 다시말해 영적 음식에
 독소가 섞일때
재빨리 이를 제거해
 버리지 않고 자유의지로
그 독이 든 음식을 멋대로
 먹어 버린다면 영혼은
병들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귀중한 초자연적 생명이
죽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대죄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면 영혼이
그러한 독을 직접 받아 먹지는
않았으나 아주 멀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런 독에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섞어 겉으로는 맛좋아
보이는 음식을 탐내거나
그러한 음식이 많은 장소에
가까이 가기를 즐길 때
이러한 영혼역시
정상적으로 양분 있는
영적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므로 점차 영양 실조에
걸려 초자연적 생명의 성장이
 방해를 받고 결국 시들어
죽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냉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자연적 생명의 성장을
방해하는 유혹과 죄와
냉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초자연적 생명의 성장을 가로막는 유혹
 
사람이 여러가지
시련이나 유혹을 당하는 것은
 원죄의 결과인 사욕 편정의
 탓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러번
사탄의 유혹과 싸우셨고
자신과의 싸움도 하셨습니다.
수난 전날밤에는
게세마니 동산에서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당신의 인간적 본성에서 오는
고민을 견디어 내시느라
 피땀을 흘리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속세의 악인들과 마귀는
직접 우리를 유혹할 수도 있지만
대개 우리 사욕 편정을
교묘히 부추킴으로
간접적으로 죄를 짖게 합니다.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속세의 악인들과 사탄은
직접 우리를
유혹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사욕편정을
교묘히 부추킴으로
죄를 짖게 합니다.
 여기서는 이 사욕편정을
자극하고 죄로 이끄는
 유혹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유혹 자체는
물론 사람의 육체 즉
감관(感官)에만
기인하지 않고
 직접 영혼에서
발원하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지배를 싫어하거나
그 속박을 벗어나려는
교만의 유혹
혹은 남을 미워하여
복수하려고 하는
 질투의 유혹
혹은 남을 속이려는
거짓유혹들은
그 발원처가
 육신이 아니고
정신인 것입니다.
 
(정신유혹)
교만의 유혹
하느님의 지배를 싫어하고
그 속박을 벗어나려는 것.

질투의 유혹
남을 미워하고
복수하고자 하려는 것.

거짓 유혹
남을 속이고
넘어뜨리려 하는 것.
유혹은 사람의 상상 속에
그 본능에 만족을 주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식욕이나
성욕의 욕망을 돋구는
상상이 떠오릅니다.
본능은 생리적으로
그런 대상에 대하여
쾌감을 가지게 됩니다.
육신뿐 아니라
정신과 의지도
그 쾌감에 동의하도록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것을 제 1 충동
유혹(Motus primi)
이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죄를 짓는 것을 되돌아보면
유혹이 어떻게 죄까지
짖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죽지 않으려거든
지선악 과실수만은 따 먹거나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지만
뱀은 하와에게 말합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너희가
지선악 과실수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때문에
망설였지만 뱀의 말을 듣고
지선악 과실수를 바라보니
 과연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참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 먹고
아담에게도 따 줌으로
죄를 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해부해 보면
처음에는 마음이 허락을 하지 않다가
달콤한 말을 듣고는
먹고 싶은 유혹이 들고
그러한 욕정의 눈으로 보니
먹지 않고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기 전까지는
 죄가 되지 않고 유혹에만
노출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먹어야만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김으로 유혹만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유혹에 오래
노출되다 보니
하느님의 간곡한 말씀을
 들을 힘 다시말해
유혹을 이길 힘이 떨어졌고
우선 먹고 보자는
결정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만것입니다.
 
다시말해 유혹과 갈등,
그리고 자유의지가
동원된 죄를 짖게 된 것입니다.
결국 유혹이 커다란
쾌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 쾌감을 성취하고픈
자유의지가 원죄를
만든 것입니다.
 
제1충동 유혹은
크건 작건 간에
그 자체는 쾌락(유혹)에
 대한 동의는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생리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성을
그렇게 조성하셨으니
 우리는 그 충동을 참아
견딤으로써
극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1충동
(쾌락의 수락이나 거부에 따른 갈등)
의 결정은 자유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이때 하느님의 소리인 양심은
 항상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것을
 선택하도록 양심의 가책이라는
결정을 통해 선택을 요구합니다.  
이것을 하등 인성과
고등인성의 분깃점
(유혹의 분깃점)
이라고도 합니다.
영혼안에서 이러한 싸움은
때로는 참을 수 없이
괴롭게 하므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실 사람이란
고등인성과 하등 인성의
(영과 육)
불가분의 관계로
 완전히 결합된
합일체이기에
유혹을 받을 때에
자유의지가 과연
동의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뚜렷하게 구별하기가
쉬운일도 아닙니다.
 특히 감상적이고
세심한 사람은 자칫하면
 양심의 불안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러한 경우의 판단을
돕기위해 윤리학자들은
 몇가지 원칙을
세워 놓았습니다.
 즉 하등 인성인(육욕)이
 아무리 육욕의
자극을 느낄지라도
영혼의 고등인성이
그로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유혹 받기를 싫어하는
동안은 결코 자유의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자극을
 물리칠 때에
좀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였다고
대죄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유혹의
진행상황을 고찰하고
자유의지의 개재여부를
판단한다는 구실하에
유혹을 되살려
재차 체험해
보고자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체험
즉 유혹을 일부러
재현시키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그 유혹 자체가
다시 되살아 남으로서
오히려 전 보다 더 마음이
괴롭고 죄를 지을 위험이
더 커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유혹의 자극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아직 흥분 상태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말고,
 내적으로 평화로움이
유지된 상태에서
성찰을 해야 아무런
해가 없는 것입니다.

 

과도한 자신
 지나친 안심은 금물입니다.
그러나 경계심과
조심성이 너무 지나쳐도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잃게 됩니다.
항상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는
경계속에 긴장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이
오히려 영혼에 이득이 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마태 26,41)
 
"자기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2-13)
 
유혹이 올때는
예수님처럼 늘 기도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이 있기전에 광야에서
사십주야를 단식과
기도로 지내셨고
 
게세마니 동산에서는
닥쳐올 고난과 죽음에 대한
불안에 떨며 피땀을 흘리면서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하심으로써
혹독한 유혹을 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미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항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유혹이 닥쳐올때
오히려 자신을 견고하게 하는
이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욕과
사탄과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예견된 무장과
준비를 하느냐에 승리의
성패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주 자신을
성찰함으로 약점을 보다
자세히 알애내고
과신을 버리며
신중히 겸손한
덕성을 닦으며
 하느님만을 신뢰하여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유혹의 당하기전의
예비는 이정도로 하고
다음은 유혹이 들이닥쳐
 영혼을 괴롭려 몹시
힘들게 할때에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유혹이 우리를
갑자기 놀라게 할 때에도
 침착하게 자기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또한 예수님의 형제로의
품위를 지니고 태연자약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하느님과
호수천신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다시말해 유혹적인
집념이나 대상에서 마음을
다른데로 돌림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명념하여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바를 묵상하며
항상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했다고 해서
유혹을 물리쳤거나
극복한 것은 아니고
오로지 유혹을 물리치기위한
 준비조건을 갖춘 것 뿐이니
자유의지의 결정을 통해
선택해야 비로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는
하느님과 사탄 사이에서
결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업습니다.
타협이나 양보가 없는
 어느쪽이든 필연적인
선택을 하여 단호히 유혹을
 물리치고 의식적으로
 하느님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의지가
양심의 판결을 따라
선에 대한 결심을 굳혀
유혹을 거부하는
두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 있습니다.

 

 

◎유혹을 이기기 위한 두 가지 방법.
기피하는 방법 
 (간접적)
아예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공격적인 방법)
직접적
신랄하게 파헤쳐
잘못을 규명
 
기피하는 방법은
유혹이 예견되거나
유혹이 올때 그대상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
접속을 하다가 음란물을
 접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것을 보지않고
닫아버리거나
컴퓨터를
 꺼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신체와 유혹의
대상을 격리시켜
우리의 욕정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격적인 방법은
 유혹에 대해 정면 공격과
더불어 모든 유혹을
격침시키는
저돌적인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마음안에
분노,
증오,
 질투,
교만,
 시기 등의
감정이 생기기 쉬운데
어떤 때는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불길처럼 일어나
흥분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럴때에는
그 원인이나 대상을
기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럴때에는 과감하게
 능동적인 공격을 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그 원인이나 대상의
그릇된 가면을 벗기고
정체를 속속들이 파헤쳐
자신의 질투,
교만,
 시기 등의 간악한
유혹에 대하여
 스스로 준엄한
고발자가 됨으로써
그 허위와 사악한 술책을
 가차없이 단죄하는 것입니다.
마치 검사가 법정에서
피고인의 배후를 폭로하고
숨겨진 범죄 동기나
목적을 낱낱이
들추어 냄으로서
추악한 위선과 부정과
비열한 행동에 철퇴를
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유혹과의 싸움에서
 직.간접으로 싸우는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그와 반대되는 좋은
덕성인 사랑,
겸손,
정직 등을
마음속에 되새기어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는 양심의
소리를 따를 때
우리는 사악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선행의
촉진제로 전환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을 물리치고자
하는 결정은
즉각적이어야 하며,
확고하고
단호해야 합니다.
(독사를 빨리 피하고 즉석에서 반격하듯)
또한 인내성과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유혹과의 투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내력입니다.
 공격해 오는 유혹자가
완강하고 집요한 그 만큼
우리의 방어진도
견고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때 인내는
더욱더 튼튼한
방어진을 구축합니다.
 예수님은 악령이
얼마나 강하게
공격하는지를
말씀하시었습니다.
 
악령이 어떤
사람 안에 들어 있다가
그에게서 나오면 물 없는
 광야에서 쉴 곳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찾지 못하면
전에 있던 집으로
되돌아가야지 하면서
다시 돌아간다.
 돌아가서 그 집이
비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말끔히 치워지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자리잡고 산다.
그러면 그 사람의
형편은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
(마태 12, 43-45)
 
우리는 일생을 통해
 끊임없이 유혹과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영적 생활에 유익하고
 필요한 시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초목도 비바람과 더위와
추위를 통해 자주 시달릴 수록
땅속에 깊은 뿌리를 내려
강하게 성장하듯이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혼신을 다해 끊임없는
 유혹과 싸우는 가운데
자기 방어에 익숙해지고
하느님안에서
 매일같이 깊은 일치를
이루어 덕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유혹과 끊임없는 싸우며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보람있는 승리를 위한
투쟁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생각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그러한 길은 필연적인 길인만큼
 이를 통해 우리는 겸손과
인내와 믿음 같은
중요한 덕성들을 닦아
 우리의 죽음을 통해
영복의 월계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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