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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31 조회수842 추천수14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8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일 가해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Mt.16.24)
 
 
제1독서 예레미야서 20,7-9
제2독서 로마서 12,1-2
복음 마태오 16,21-27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이란성 쌍둥이가 이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먼저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했지요.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했지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동생이 다시 말했습니다.

“말해줄 게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나서 말했지요.

“엄마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너는 본 적이 있어?”

오빠의 기세에 눌린 동생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가끔 무언가 꽉 조여 오는 것 같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고 어떤 때는 아프기도 해.”

“나도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음, 내 생각엔 이 꽉 조여 오는 게 다른 곳,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곳, 엄마 얼굴을 보게 될 곳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표시인 것 같아. 오빠는 흥분되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하면서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누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있나요? 여동생일까요? 아니면 오빠일까요? 지금 이들의 상황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배 밖을 상상 하기 힘들며, 엄마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배 밖으로 나와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엄마가 없다고 말하실 수 있습니까? 또한 배 밖의 이 넓은 세상이 가짜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사실 현대인들은 합리적이지 않으면 또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지 않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분들도 있지요.

“하느님이 어디 있어? 내게 보여줘. 그러면 내가 믿을게.”

그러나 합리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이 꼭 진실만은 아님을 앞선 이란성 쌍둥이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간접적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인간적인 지식과 판단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강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예고는 누구의 뜻을 밝히는 것일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것이지요. 이에 반해서 베드로의 말은 누구의 뜻일까요? 바로 자신의 뜻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뜻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보다 윗자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의 뜻보다 낮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지요.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은 첫째 자기 자신을 버리고, 둘째 자신의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어야 하며, 셋째 무조건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자신을 버리는 것도 어려워하고, 이 세상에서 고통스럽고 힘든 십자가는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지요.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을 따르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왕이 평복을 입고 지방을 순찰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와서 무엇을 좀 달라고 손을 내밀더랍니다. 이에 왕은 그 거지에게 “네가 먼저 무엇을 내게 주면 나도 네게 주겠다.”고 말했지요. 그러나 거지는 왕에게 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앞 동네에서 받은 옥수수 한 되 가운데서 다섯 알을 집어주며 “제게는 이것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하였지요. 그것을 받은 왕은 뒤에 따라오던 재정대신에게 “금자루에서 이 옥수수 알만한 금덩이를 5개 꺼내게.”라고 한 뒤 그것을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 순간 거지는 속으로 크게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아하!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옥수수 주머니를 아예 다 그분께 드릴 걸! 그랬으면 그만큼 금덩이를 받았을 텐데. 내가 왜 다섯 알만 드렸던가!”

그렇습니다. 자기 것을 더 많이 챙기는 마음, 그래서 주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지 못하기에 우리들은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은총을 조금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맡기는 마음,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이 우선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영혼을 망치려면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화단을 망쳐버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화단에 불을 지르고 물을 많이 부어버린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쉽게 망쳐 버리는 방법은 그 화단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잡초가 무성해져 저절로 황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떻게 하면 부부간의 사랑이 깨어질 수 있을까? 매일같이 트집을 잡아 헐뜯고 상대방의 약점을 노골적으로 공격한다면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수고할 필요가 없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내버려두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내 인생을 망쳐버릴 수 있을까? 방탕하게 생활하며 법을 어기고 건강을 마구 상하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그저 나를 맡겨두면 저절로 나는 망쳐져 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내 영혼을 어떻게 하면 망쳐버릴 수 있을까? 하느님의 존재와 그 진리를 철저하게 배척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내 영혼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처럼 관심 없이 내버려둔다면 곧 무참히 망쳐져 버릴 것이다.

이 세대를 본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 것들의 가치를 잘 깨닫고 있다든지 혹은 세상의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행동한다든지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세상의 흐름에 내어 맡기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갇혀서 흑은 그 물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세상적인 욕심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미세한 세균이 침투해 들어와서 서서히 증상이 악화되어 나중에는 온 몸에 퍼져 어쩔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는 것과 같다.

이 세대는 나날이 새로운 모습으로 신자들을 유혹하여 갖가지 우상을 좇게 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낼 수 없도록 한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허무의 나락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날마다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몸부림이다.
 
 
 
 
“God forbid, Lord! No such thing shall ever happen to you.”
He turned and said to Peter,
“Get behind me, Satan! You are an obstacle to me.
You are thinking not as God does, but as human beings do.”
(Mt.16.22-23)
 
 
 
 
Devoted To You - Carly Simon & James Tayl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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