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다니엘 1장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신앙(信仰)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1-11-20 조회수1,300 추천수1 반대(0) 신고

 

오늘부터 약 15회 정도에 걸쳐 다니엘 복음서를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많이 다를를 것입니다.

참 성경의 진리를 알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거든요.

역사에 펼쳐진 하느님의 일들을 보면서 남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저도 배운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참고로 하시면서 곰곰히 묵상해 보세요 ~살롬.~ 



(공동번역성서) 다니엘 1장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신앙(信仰)


 다니엘서는 이야기와 예언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책이다.

먼저 1장부터 6장까지는 다니엘의 경험들에 대한 이야기이며 7장부터 마지막 12장까지는 예언들을 기록해 놓았다.

처음에 나오는 6장까지의 이야기들을 통하여 장래에 다가오는 사건들을 대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6장까지의 다니엘의 경험과 이야기들을 깊이 이해해야 7장부터 나오는 예언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그 의미를 갖게 된다. 자 그럼, 이제부터 다니엘서 1장으로 가서 한 절씩 읽어 가면서 연구해보자.

 

(다니1:1) 1 유다 왕 여호야킴 제삼 년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쳐들어 와 예루살렘을 포위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다. 그 당시에 유다왕은 야호야킴이었다. 원래 이스라엘 나라 12지파는 솔로몬 왕 이후에 북방 이스라엘 10지파와 유다 2지파로 갈라졌다.

그런데 북방 이스라엘은 너무나 불순종했기 때문에 B.C 721년경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해서 다 흩어졌고 남쪽의 남방 유다만 남게 된다. 다니엘은 남방 유다가 바벨론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있는 동안에 이 책 대부분을 기록한 것이며 메대 페르샤 시대에 기록한 것도 후반부에 조금 있다.

이 예언서는 유다 왕과 바벨론 왕 사이의 전쟁으로 시작된다. 이 전쟁은 이 세상의 선과 악의 대(大)쟁투(爭鬪)를 상징한다. 유다와 바벨론의 전쟁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늘의 세력과 지옥의 세력의 투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예언(預言)은 결국 하느님의 세력이 승리하게 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이 땅에 성취될 것을 말하고 있다.

 

여호야킴은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서 그는 25세부터 36세까지 왕위에 있었다 (물론 여호야킨과 시드키야가 그 이후에 잠간씩 다스리는 일이 있었지만). 그런데 그는 유다를 반역(反逆)과 불순종(不順從)으로 이끌어 간 악(惡)한 왕이었다.

열왕기 상하와 역대상을 보면 유다 왕들의 역사가 나오는데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타락하고 반역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취급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해야 영생에 이르고 어떻게 할 때 저주와 심판을 받는 것인지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다.

성경은 과장하거나 불필요하게 화려하게 꾸미는 미사여구가 없는 진리이다. 하느님의 안목(眼目)으로 기록된 것이 성경(聖經)이다.

유다 나라가 하느님께 충성하고 그분의 말씀들을 순종했을 때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축복하셨다. 또한 이방 나라들이 쳐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반역(反逆)하고 불순종했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수가 없으셨다. 그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공격해 와서 다니엘과 유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이다.

 

유다의 멸망 원인과 하느님의 섭리

 

예루살렘은 참 하느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참 하느님과 그 진리에 대하여 세상에 알려주는 하늘 왕국의 대표자로 존재했다. 독자(讀者)들도 살아있는 하느님의 대리자이므로 하느님의 품성과 진리를 세상에 대표해야 한다. 참 하느님을 어떻게 섬기는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실물교훈으로 예루살렘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곁길로 가기 시작했다. 이방 나라들을 본받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 나라들처럼 왕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방신들을 섬기기 시작하였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예언들을 보내셔서 여러 번 경고하셨지만 듣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은 결국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이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의 성공과 번영을 얻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과 계명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의 신을 섬기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도 결국 유대인들처럼 하느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영적인 교훈이 된다.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잡혀가게 된 두 가지 섭리와 목적을 알아보자. 하느님께서는 불행 속에서도 그분의 뜻을 이루신다.

1. 유다 나라를 회개시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을 다시 신뢰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유대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을 허용하셨다.

번영의 때에 하지 못한 일들이 가끔 시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가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 불평하고 원망하지마는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시련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씻으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2. 그 당시 바벨론은 세계적인 대제국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진리의 지식이, 잡혀간 유대인들을 통하여 바벨론과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허용하셨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닌가! 유다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 가는 일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다.

원래 바벨론은 유다 나라가 아닌 애굽을 공격하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애굽과 근접해 있는 적은 나라들과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때에 유다의 여호야킴 왕이 바벨론과의 조약을 어기고 애굽과 화친을 맺었다. 그래서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하게 된 것이었다.

고대에 적군들이 성을 에워싸는 일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먼저 성을 포위하여 식량의 통로를 끊어 버리고 성 안의 백성을 굶주리게 한다. 목이 마르고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를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생긴다.

여러 주일, 여러 달 동안 백성들은 성 안에서 두려움 가운데 떨며 살게 된다. 곧 시가지에 피의 강이 흐르게 될 것을 예상하며 두려워 떤다. 기아선상에서 허덕인다. 그때 갑자기 대포알 같은 돌들이 날라오기 시작한다. 성벽 위에 긴 사다리들이 놓여지고 적군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다. 성벽이 무너지고 문이 부서지면서 적군들이 쳐들어온다. 피가 길거리에 낭자해진다. 이것이 옛날의 전쟁이었다.

 

현대 교회의 영적 상태

 

(다니1:2) 2 주께서는 그에게 유다 왕 여호야킴을 끌어가고 하느님의 집 물건 얼마를 빼앗아 가게 하셨다. 느부갓네살은 그 물건들을 시날 땅에 있는 자기 신전으로 가지고 가 그 곳 곳간에 넣어 두었다.

 

그 엄청난 전쟁이 유다 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바벨론 군사들이 들어와서 전부 부수고 도륙하고 금은보화를 빼앗고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성소(聖所)에 들어가서 성소를 훼파하는 것이었다. 바벨론 군인들이 들어와서 하느님께 예배(禮拜)하고 제사(祭祀)드리기 위해 쓴 금은(金銀) 기명(器皿)들을 가지고 나간다.

성소(聖所)는 이 우주를 지으신 하느님께서 임재(臨在)하시는 곳인데 그 성전이 불타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있을 수가 있는 일인가!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고 계명을 가지고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진리와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진리의 하느님이 우리 속에 계셔서 우리의 보호가 되시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이름만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람이 아니다.

 

(다니1:3-5) 3 느부갓네살왕은 내시부 대신 아스브낫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왕족과 귀족들의 자제를 몇 명 뽑아 들이되, 4 흠없이 잘 생기고, 교육을 받아서 막히는 데가 없으며 무슨 일에나 능숙하고 사리에 밝아 왕궁에서 일할 만한 젊은이들을 뽑아 바빌론말과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5 또 왕은 그들에게 날마다 궁중요리와 술을 주면서 앞으로 어전에서 일볼 수 있도록 삼 년 동안 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런 중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특별히 명령해서 유다 나라의 젊은 왕족의 청년들과 똑똑한 청년들을 데리고 1차 포로로 데려갔다. 그들을 바벨론으로 데려가 바벨론 제국의 교육을 시키고 대학공부를 시켜서 다시 본국으로 돌려보낸 후 바벨론의 정책으로 자기 나라들을 다스리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느부갓네살 왕은 유대와 전쟁 중에 본국에 있던 자기 부친 느보폴라살이 죽었다는 통고를 받았고 혹시 본국에 무슨 혁명이 일어날까봐 장군들에게 전쟁을 맡기고 급히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이때 느부갓네살 왕은 돌아가면서 유다 나라의 젊은 포로들을 먼저 데리고 간 것이다.

성전(聖殿)의 기명(器皿)들을 가지고 가서 바벨론의 보물 창고에 두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생각해 보라. 말둑신은 이방신의 보물 창고를 맡고 있는 신의 이름인데, 이 말둑신의 창고에 하느님의 성전 안에서 쓰던 금은 기명들을 갖다 놓은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영적(靈的)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眞理)가 바벨론에게 빼앗긴 것과 같다. 바벨론의 이방 종교 가르침이 그리스도교회에 들어와서 순결한 진리가 타협되고 혼합되었다. 교인들의 영적인 생애가 타협되었다. 세상과 교회가 하나가 된 것이다.

세상의 출세를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도 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교회 안의 중요한 것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있는 듯한 그러한 영적인 상태가 오늘날 현대 교회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니엘의 이야기가 그때 있었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우리에게 또 다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젊은이들

 

느부갓네살 왕이 첫 번째 포로로 잡아간 젊은이들 중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든 참화(慘禍)를 목격했다. 자기 부모들이 죽임 당하는 것을 목격했을지 모른다. 그들은 걸어서 바벨론까지 먼 길을 끌려갔다.

성전기구들이 마차에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집에 있을 때에 갑자가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 왔다. 그리고 엄청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기도했을 것이다. “하느님! 우리 부모를 살려 주십시오. 우리 왕국을 살려 주십시오. 우리 교회를 보호해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며 하소연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에는 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군대들이 들어왔다. 엄청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계속 된다. 갑자기 대문이 부서지고. 군인들이 쳐들어온다. 마당에 부모를 끌어내어 칼로 쳤을지 모른다. 성경에 이런 상황들은 정확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의 부모가 살해된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때 다니엘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그 고통과 증오심이 어떠했겠는가! 자기 부모를 살해한 저 적군들, 나라를 멸망케 한 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군대들, 성전을 훼파(毁破)한 그들을 보면서 마음 가운데 분노(忿怒)와 질시(嫉視)와 증오(憎惡)와 억울함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때 당시 다니엘의 나이는 젊은 17세~19세였을 것이다. 그는 분노하였으나 낙심하지 않았으며 절망 가운데 빠지지는 않았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가 포로로 잡혀가서 하느님께 충성을 다하고 기도하는 것들을 보면서 알 수가 있다.

하느님께서 다니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이유를 알 수가 있다. 그는 그러한 시련 가운데서도 견디고 하느님을 여전히 신뢰하며 충성할 수 있는 그러한 품성이 준비된 젊은이였다. 이런 젊은이들이 교회에 지금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 환난의 시기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 앞에 충성할 것을 마음에 작정한 젊은이들이 오늘날 교회에도 많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독자(讀者)분들이 참석하는 교회의 젊은이들은 어떠한가?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교훈을 주고 있다.

다니엘은 엄청난 경험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않았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 다니엘은 왕족이었다. 역사를 보면 다니엘은 왕의 친척이었다. 똑똑한 젊은이로서 세 친구와 함께 1차 포로에 잡혀서 가고 있는 것이다.

신발이 변변할 수 있었겠는가! 먹을 것도 없이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묶여서 끌려간다. 분노와 답답함과 옆에 있지 않은 부모를 생각했지만 하느님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게 또 한 가지 깊은 실망을 주는 것이 있었다.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기까지 유다 광야와 모래밭을 거쳐 간다. 삭막한 사막을 지나 끌려가는데 그 옆에 한 마차가 지나간다. 그 마차 안에 눈에 익숙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하느님을 예배(禮拜)하고 제사할 때 쓰던 금은 기명들이 실려가고 있지 않은가! 금촛대가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다니엘서 5장에 보면 금촛대 뒤에 한 손이 나타나서 글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금촛대는 바로 바벨론 군대들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왔을 때 성전에서 가지고 왔던 금촛대이다. 그때 그의 마음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나’하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니엘은 낙심치 않았다. 주님께서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허용하신다고 믿었다. 그는 신뢰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주 앞에 기도했다. 그의 기도와 헌신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바벨론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다니엘을 통해서 이 세상 역사의 놀라운 예언을 보여주시기 시작한 것이다.


 
개국(開國) 이래로 없던 환난(患難)


- 다니엘 12장의 몇 구절을 먼저 이해해 본다 -

(다니12:1)“.1 그 때에 미가엘이 네 겨레를 지켜 주려고 나설 것이다.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찌기 없었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그런 때라도 네 겨레 중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람만은 난을 면할 것이다. ”


다니엘은 다니엘 1장부터 12장까지 기록하고 제일 마지막 장에 가서 지금까지 기록한 모든 말씀과 예언을 토대로 해서 우리가 이 마지막 시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바로 직전에 있는 마지막 시대의 환난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다니엘 연구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네 겨레”는, 다니엘이 믿던 진리 그대로를 믿는 마지막 시대의 영적 이스라엘 민족인 하느님의 참 교회를 상징한다. “미가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미가엘은 “누가 야훼와 같으냐”라는 뜻으로서 하느님께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귀의 군대와 전쟁하실 때의 별명은 미가엘이다. 그러므로 미가엘이 당신의 백성들을 마지막 환난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메대 페르샤 시대에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었는데, 특별히 주님의 참된 백성들을 죽이라는 사형명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마지막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에 어떤 일이 생기게 될 것인가? “나라가 생긴 이래 일찌기 없었던 어려운 때가 올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지금까지 6천 년 인류 역사 가운데 단 한 번도 있은 적이 없는 놀라운 환난이 이르러 올 것이다. “그런 때라도 네 겨레 중에서 이 책에 기록된 사람만은 난을 면할 것이다.”

하늘의 생명책(生命冊)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 하느님의 보호를 받으며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께서 다니엘 12장에 마지막 환난에 대하여 기록해 주신 것은 다니엘서 1장부터 12장까지에 있는 모든 내용들을 연구하면서 장래에 있을 사건들에 대한 예언들을 이해하고, 또한 그 속에 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러한 사건들이 다가 올 때에 어떻게 대처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준비된 사람들만이 미가엘의 보호를 받으면서 마지막 환난을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말씀이 설명해 주고 있다.

 

(다니12:2) “2 티끌로 돌아 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이 장면은 예수 재림 직전에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실 때에 의인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마는, 예수께서 오시기 바로 직전에 어떤 모종의 특별한 부활이 있을 것을 이 절은 말하고 있다.

마지막 환난이 끝나는 무렵, 예수의 재림 바로 직전에 또 다른 하나의 부활이 있을 것에 대한 힌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때에 많은 자들이 깨어나서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고(예수의 재림 시에 있을 의인들의 부활) 어떤 자들은 부활했다가 영원히 모욕을 당하고 다시 죽음을 당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당신을 잡아서 심판하던 가야파와 안나스 같은 유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었다.

(마태26:63-64) “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대사제는 다시 '내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 분명히 대답하여라. 그대가 과연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하고 물었다. 64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것은 너의 말이다' 하시고는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나 하늘에서 재강림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그들이 과연 누구를 핍박하고 죽였는지에 대하여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다니12:3) “3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

다니엘은 마지막 시대에, 개국 이래로 없던 엄청난 환난이 온다고 예언하고 있는데 그때에는 더 이상 우리의 돈은 필요가 없어진다. 자동차, 좋은 직장, 좋은 평판, 인기, 편안한 집들이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의 여부이다.

그러므로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아끼는 것들은 다 재가 되어서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슬기로운 지도자들은 밝은 하늘처럼 빛날 것이다. 대중을 바로 이끈 지도자들은 별처럼 길이길이 빛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 바로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는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 시대에 더 큰 의미와 예언의 적용을 가지고 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에서 포로로 잡아 온 젊고 똑똑한 청년들을 바벨론의 청년들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포로로 잡아 온 청년들과 함께 바벨론 대학에서 3년 동안 특별 교육을 시킨 다음에 각각 자신들의 나라로 되돌려 보내서 그곳에서 정치를 하도록 하며 바벨론의 과학과 철학을 가르치게 했는데,

이것은 바벨론 제국이 고안해 낸 특별한 방법이었다. 바벨론 사람들이 직접 점령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피점령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저항과 폭동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포로로 잡혀 간 상황 속에서는 신앙대로 살기가 전혀 불가능하게 보이는 입장이었다. 다니엘 예언서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승리하는 예언자 다니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1장 6절부터 공부해 보자.

 

이름의 의미와 역할

 

(다니1:6-7) 6 그들 가운데 유다인으로는 다니엘, 하나니야, 미사엘, 아자리야라는 젊은이들이 있었다. 7 내시부 대신은 이 젊은이들에게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다. 곧, 다니엘은 벨트사살, 하나니야는 사드락, 미사엘은 메삭, 아자리야는 아벳느고라고 부르게 하였다.

하느님이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서 어떤 일을 시작하시고 그들이 얼마나 신실(信實)했는지를 이 말씀이 설명해 주고 있다. 이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나이는 십대 후반이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곧 들어갈 나이에 있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알아보자.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약 70년을 살았는데 페르샤왕, 키루스왕, 다리우스왕 때까지 그가 국무총리를 했었음을 다니엘서를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리고 4절에 그들을 “소년”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보더라고 그들이 나이 많아서 잡혀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젊은 나이에 하느님과 진리(眞理)에 충성(忠誠)하는 그들의 모습이 다니엘서에 그려져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바로 그것은 훌륭한 가정교육의 결과였다. 그들의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그들을 진실되게 가르쳤다. 또한 부모 자신이 하느님께 진실되게 순종하며 사는 모습을 그 자녀들에게 보여주었을 것이다.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그들이 받은 신앙 교육대로, 포로로 잡혀가서 희망(希望)이 없어 보이는 그러한 바벨론 도성 안에서도 그들의 신앙(信仰)을 지키면서 충성스럽게 살았다.

그들을 잡아간 느부갓네살 왕도 또한 젊은 왕이었다. 그는 유대에서 온 청년들을 세뇌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앙을 없애고 바벨론의 이교 신앙과 철학으로 그들의 머리를 채우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그들의 이름을 바벨론의 이름으로 바꿨다고 성경은 말한다.

성경에서 이름은 성품을 나타낸다. 예를 들자면, 야곱은 원래 히브리말로 “속이는 자”라는 뜻이다.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 그는 속이는 자였다. 그런데 그가 얍복 강가에서 승리한 다음에 하느님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주셨다. 이스라엘은 “승리자”로서 하느님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뜻이다. 얍복 강가에서 성품의 변화를 경험한 다음에 그러한 이름을 받았다.

또 아브라함은 원래 그의 이름이 아브람이었는데 아브람의 뜻은 “높이 들린 자”라는 뜻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이다. 성품과 태도가 변했을 때 그 이름을 바꾸는 것이 성경의 사상이다. 사도 바울도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그

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을 바벨론의 철학과 신을 섬기게 하는 사람으로 바꿔주기 위해서 먼저 그들의 이름을 바꿔주고 있는 사실을 다니엘 1장에서 보게 된다.

히브리 이름으로 다니엘은 “하느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여전히 다니엘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의 이름이 불리어질 때마다 그는 그의 마음 가운데 다음과 같이 상기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히브리 사상에서 심판자는 재판관뿐만 아니라 변호자를 상징한다. 나를 변호하시고 내 곁에 항상 계시는 분, 나를 올바르게 판단하여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 심판자라는 의미에 담겨져 있다. 다니엘은 자기 이름을 들을 때마다 하느님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바벨론의 이름으로 바꾸어지게 되었다.

바벨론의 이름으로 “벨드사살”이라고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 바벨론의 이방신인 “벨신의 보물을 맡은 자”라는 뜻이다. 얼마나 이상한 이름인가. 또한 다른 세 친구들의 이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이다.

하나냐 이름의 뜻은 원래 “주께서 내게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이다. 심지어는 포로생활과 슬픔 속에서도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사드락”이라고 바꾸었는데 “태양(신)의 영감”이라는 뜻이다.

미사엘은 “하느님을 닮은 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인데 “메삭” 곧 “세바 여신에게 속한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바꿨다. 아사랴는 “주께서 나의 도움이시라”는 뜻인데 “아벤느고”라는 이름으로 바꿔치기를 당하였는데, “아벤느고”는 “느보신의 종”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바벨론 왕은 히브리 젊은이들의 이름까지 바꾸면서 그들의 참 하느님 야훼에 대하여 잊어버리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우리 머리속에 상상해 보라. 우리가 2500년 전에 살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집을 떠나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집에서 약 1000마일 떨어진 원수의 땅으로 포로가 되어 가는 것이다. 부모님은 이미 살해 당했고, 피가 낭자한 조국의 거리들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마어마한 바벨론의 궁중의 한 연회장에 끌려와 있는 것이다. 느부갓네살 왕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있다. 건장한 군인들이 곁에 지키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 앞에 맛있는 산해진미의 음식들이 상 위에 가득하고 거기에는 취하게 만드는 포도주들이 있으며 또한 먹지 못할 부정한 음식들이 가득 차 있다.

보기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잘 차려져 있으며 매우 감각적인 분위기가 주변을 두르고 있다. 입에서 군침이 돈다. 그런데 이 모든 음식들은 먼저 우상에게 가서 바쳐진 후에 소년들 앞에 가져왔기 때문에 그것을 먹으면 바벨론의 우상을 섬기고 경배한다는 뜻으로 비추어지게 된다.

만약 이러한 분위기에 독자들이 처해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는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가 놓여있는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대목인가.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에 따라서 그들의 신실성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왕의 음식을 거절한 청년들

 

(다니1:8-16) 8 그런데 다니엘은 궁중요리와 술을 먹어 부정을 타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하고 내시부 대신에게 그런 일을 피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9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 내시부 대신의 사랑과 귀여움을 받게 해 주셨다. 10 내시부 대신은 다니엘에게 사정했다. '나는 왕께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몸이다. 너희가 왕께서 정해 주신 음식을 먹지 않아 얼굴이 너희 또래의 다른 젊은이들보다 못하게 보였다가는 내 목이 달아난다.' 11 그래서 다니엘은 내시부 대신의 지시대로 자기와 하나니야와 미사엘과 아자리야를 맡아 보살피는 감독관에게 청했다. 12 '소생들에게 열흘 동안만 시험삼아 야채와 물만 먹게 해 주십시오. 13 그런 뒤에 궁중요리를 먹는 다른 젊은이들과 우리 얼굴을 한번 비교해 보시고 나서 소생들을 나리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14 그는 다니엘의 말대로 열흘 동안 두고 보았다. 15 열흘 뒤에 보니, 그들의 얼굴은 궁중요리를 먹는 다른 젊은이들보다도 살이 올라 보기에 더 좋았다. 16 그래서 감독관은 그들에게 음식과 술 대신 야채를 주었다.

성경은 말하기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뜻을 정하여 단호하게 그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심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포로로 잡혀와서 대학에서 왕의 명령을 따라서 공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왕의 호의로 주어진 음식을 거절하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의 음식을 거절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참 하느님 야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바벨론의 우상들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둘째는, 왕의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러한 부정한 음식들과 포도주로 자기의 뇌세포들에게 영향을 주어 자기의 생각과 판단력을 흐리게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는 뜻이다.

 

우리들은 주님을 섬기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보존하는가? 왜 성경(聖經)은 독주(毒酒)를 마시지 말라고 말하는가? 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좋지 않은 음식을 먹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의 두뇌와 몸을 깨끗하게 하고 건강하게 보존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을 때 깨끗한 머리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원래 인류에게 주신 채식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이 히브리 가정교육을 잘 받은 덕분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채소, 곡류, 과일, 견과류들의 정결한 음식을 먹도록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진리와 원칙에 순종하는 곧은 마음

 

우리도 환난이 오기 전에 먼저 마음을 곧게 정하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 어떠한 일이 닥칠지라도 하느님의 진리대로 살기로 작정하는 믿음을 지금 평화스러운 때에 키워야 한다. 그러한 결심은 우리 몸 가운데 어디 부분에서 이루어지는가? 가슴에서 하는가? 손에서 하는가? 그렇다. 우리 마음속에서 한다. 마음속에 있는 양심이 한다.

동물들에게는 양심이 없다. 해피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있다고 가정하자. 해피는 옆집 마당에 뼈가 있으면 그냥 달려가서 주어 먹는다. 해피는 그것이 남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 양심이 없다.

하느님의 계명에 도적질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것은 먹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의 기능이 마음 가운데 없다. 만일 옆집에 뼈가 있어도 가지 않는다면 양심의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옆집에 있는 큰 개에게 물릴까 봐 무서워서 안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심의 소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특수한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양심(良心)이다. 도덕적(道德的)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양심(良心)이 있다.

 

강물이 흐르는 대로 떠내려 기는 쉽지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필자가 오래 전에, 오래곤 주 태평양 연안에 있는 연어 양어장들에 가서 견학한 적이 있다. 바다로 방류되었던 연어들이 약 2년 후에 산란기가 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 어떻게 알고 그 먼 길을 찾아 돌아오는지 참으로 기적이다.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신비 가운데 하나이다.

연어떼들이 새까맣게 돌아온다. 어장으로 가는 길이 좁지만 새까맣게 몰려서 올라간다.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나고 상처가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어떤 때는 폭포수도 거슬러 올라간다. 폭포수를 치고 위로 올라오는 그 무서운 힘을 볼 때 우리가 경의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흐르는 세상의 추세를 거슬러 올라가며 하느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로 마음에 작정하고 결심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과 다르게 지목을 받게 될지라도 진리에 굳게 서기로 결정했다. 다니엘은 평범하게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과 달랐다.

우리의 생애는 어떠한가? 독자(讀者)들은, 주님의 뜻과 진리를 알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총 때문에 타협하고 뒤로 물러가는 경험들이 혹시 없는가? 다니엘서의 예언이 제시하는 앞으로 다가올 환난을 위해서 다니엘과 같은 충성심과, 미리 결정하는 그런 결심과 믿음이 우리들 가운데 지금 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다니엘과 같은 그런 결심을 하고 살고 있는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독특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혹시 겁이 나는가? 옆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주기 위하여 원칙이나 진리를 혹시 타협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앞으로 큰 환난과 핍박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성경 예언은 말하고 있다. 그때는 엄청난 압박이 올 것이다. 지금 현재 평안한 시대에 우리가 자꾸 타협하고 산다면 그때 혼자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그런 엄청난 압박 속에서 여우리는 혼자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다니엘 1장이다.

진리(眞理)가 옳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도 분명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설 수 있는 결심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어야 한다. 다니엘 1장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진리를 위하여 혼자 설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주위의 환경에 따라 변하는 자가 아니라 그 일이 옳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이 혼자라도 설 수 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 1장의 교훈이다.

백여년 전에 쓰여진, “교육”(Education)이라는 제목 책의 한 페이지에 아주 아름다운 문구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결핍은 사람의 결핍이다. 돈으로도 사고 팔리지 않는 사람, 마음속 깊은 곳이 참되고 정직한 사람, 죄를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러한 사람, 나침판의 바늘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듯이 그의 양심이 진실된 사람,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설 수 있는 사람."

얼마나 좋은 말씀인가? 교회 안에서 정직한 사람, 비즈니스 할 때 믿을 수 있는 사람, 학교 생활에서 정직한 학생, 이웃들을 정직히 대하는 자들, 이러한 자들이 오늘날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믿는 진리와 원칙을 타협하며 살고 있는가!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짐승의 표의 환난이 우리에게 닥쳐 올 것인데 그때에 설 수 있기 위하여 지금부터 마음을 굳게 정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을 크게 축복하셨다. 그들을 통하여 왕을 비롯하여 바벨론 전국에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는 일을 이루셨던 것이다.

 

음식이 영성에 미치는 영향

 

(다니1:17-21) 17 이 네 젊은이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글공부를 잘해서 전문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다니엘은 어떤 환상이든지 꿈이든지 다 풀 수 있는 재능을 받았다. 18 왕명으로 정해진 훈련 기간이 지나자 내시부 대신은 그 젊은이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 19 젊은이들과 이야기해 보니 그 중에서 다니엘, 하나니야, 미사엘, 아자리야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어 왕은 그들로 하여금 왕궁에서 일을 보게 하였다. 20 왕이 무슨 일을 물어 보아도 그들은 온 나라 어느 마술사나 술객들보다도 열 배나 더 지혜롭고 슬기롭게 대답했다. 21 다니엘은 고레스왕 원년까지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기도했을 것이다. “이 시험을 이기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책임자에게 가서 “여기에 있는 부정한 음식과 왕의 포도주로 우리 몸과 마음을 취하게 하지 말고 우리에게 채소와 과일과 물만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열흘 동안 시험해 달라고 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열흘 동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채소와 과일만 먹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열흘 후 그들의 용모가 훨씬 더 윤택해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신 것이다.

음식물과 우리의 지성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고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가 먹는 것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두뇌가 형성된다.

먹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술을 한 잔만 마셔도 그 술이 들어가서 우리 뇌세포의 얼마나 많은 부분을 파괴하는가! 먹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양심과 두뇌 세포와 우리의 성품과 우리 몸의 세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들을 끼치는지 모른다. 이것은 지극히 과학적인 이야기이다.

시험과 유혹이 많은 바벨론 도성 중심에 살면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느님께 충성하고 진리를 지키는 하느님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절제하면서 신실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먹고 마시는 일에 타협하면 다른 도덕적인 결정도 타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적으로 먹고 마시는 일에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굳게 결심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는가?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의 상태가 하느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내 입맛과 정욕의 기쁨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다니엘 1장 17절의 중요성은 우리 마음 가운데 계속 살아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이 네 젊은이는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글공부를 잘해서 전문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다니엘은 어떤 환상이든지 꿈이든지 다 풀 수 있는 재능을 받았다.” “꿈자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이다. 하느님께서 꿈 등으로 주신 계시를 알게 되는 능력과 영성을 얻게 되었다는 말이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가!

다니엘 1장 17절은 앞으로 오는 많은 엄청난 계시(啓示)를 받고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그가 먹고 마시는 일에 충성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신실함 위에 축복해 주셔서 그들의 지성과 영성이 크게 발전하였다.

다른 학생들과 술객(術客)들보다 지혜와 총명이 10배나 더 뛰어났다고 성경은 말한다. 지식뿐만 아니라 잘 깨닫는 총명과 지혜를 주셨다. 지식(知識)과 지혜(知慧)는 차이가 있다. 지식은 학문이지만 지혜는 깨달음이다. 특히 영적인 깨달음을 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큰 축복이다.

우리가 피곤해서 하느님의 성경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잘못 먹고 잘못 마시고 부절제하여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 1장은 가르쳐 주고 있다.

 

주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특권

 

다니엘 1장은 다니엘 예언서의 서론이다. 하느님께서 사용하신 다니엘이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또한 그가 하느님께 신실하고 충성되지 아니했더라면 하느님께서 사용하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생활을 살고 있는가? 이 세상에 어떠한 이익보다도 하느님의 명령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고 있는가? 다니엘 1장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진리를 위해 자기의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자, 어떤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자, 바로 그런 자들을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높여서 바벨론 안에서 사용하셨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물러난 후에도 여전히 모든 신하들과 바벨론 제국에 속해 있는 모든 나라들에게 놀라운 증인의 역할을 하였다. 유다 땅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때가 아닌 환난의 때에 하느님께서 신실한 히브리 청년들을 사용하신 것이다. 평화로울 때 주님의 참된 증인 되기보다 시련의 때에 주님 앞에 신실하게 남아 있기로 결심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다.

다니엘 1장에서 꼭 기억할 것이 있다. 첫째, 어떤 입장에서 그들이 주님 앞에 신실하게 믿음을 지켰는지 이해해야 한다. 비위 잘 맞추면 호의호식할 수 있는 기회였지만 그러나 주님께 충성하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유다 땅에 있을 때보다 포로로 잡혀 갔기 때문에 오히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감화 때문에 성경에 대한 지식이 그 주위에 있던 여러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책과 고고학적인 기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증인(證人)되는 것이다.

다니엘서 2장에는 심지어 그들을 포로로 잡아간 느부갓네살 왕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니엘 4장에는 성경 가운데 유일하게 여러 예언자들이 아닌 이방인 가운데 한 사람인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 또한 신실했던 다니엘 때문이었다.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예언을 읽으면서 주님의 참된 진리가 무엇이고 원칙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 진리와 원칙대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 혼자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낙심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진리와 원칙을 하나씩 둘씩 타협하는 생활을 살고 있는가? 시련과 환난이 오면 그때 결심하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때가 닥치면 이미 늦는다.

우리가 승리(勝利)할 때는 지금이다. 오늘 오후에 유혹이 올 때를 기다렸다가 그때 결정하려고 생각한다면 언제나 패배할 수밖에 없다. 시험이 오기 이전에 먼저 확고한 마음과 결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승리는 오늘 먼저 있어야 한다. 지금 결심해야 한다.

마지막 환난 때에 주님께서 일어나신다고 했다. “감히 너희가 내 백성을 건드리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자굴 속에서 보호하신 하느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보호하셔서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게 하신 하느님, 그 똑같은 하느님께서 지금도 하늘에 살아 계신다. 그분께서 다니엘처럼 신실하게 사는 자들에게 오늘도 함께 축복하시고 지혜를 주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이어서 2장으로 계속 갑니다.~

*매일 한장씩 열거해 보겠습니다.가톨릭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