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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통은 생명이며 힘이다" - 8.13,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13 조회수433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8.8.13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에제9,1-7;10,18-22 마태18,15-20

                                                    
 
 
 
"소통은 생명이며 힘이다"
 


회개나 화해, 또는 고백성사를 통해
막혔던 관계가 확 뚫렸을 때 샘솟는 힘을 느낀 적 있었을 것입니다.
 
저절로 ‘소통은 힘이다.’라는 말에 공감할 것입니다.
좌우간 통(通)해야 삽니다.
 
통해야 몸과 마음도 건강합니다.
막혀 불통이 되어 답답해질 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몸의 이치와 공동체의 이치가 똑같습니다.
몸이 건강하려면
숨이 잘 통해야 하고, 피가 잘 통해야 하고,
소화가 잘 되어 음식이 잘 통해야 하듯,
유기체인 공동체가 건강하려면
역시 하느님과는 물론 서로 간에 소통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이 통하지 않을 때 병이 들듯,
소통이 안 될 때 공동체 역시 병들기 마련입니다.

한 마디로 온갖 심신의 병들은 물론 공동체의 병들 역시
불통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통자가 들어가는 말을 예로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도통, 기통, 달통, 화통, 형통,..
모두 하나로 확 뚫려 있음을 표현합니다.

며칠 전 핸드 폰 수명이 다해 교체 하느라고
하루 동안 핸드폰 없이 지내면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소통의 욕구, 앎의 욕구가 얼마나 본능적인지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편리하고 빠른 통신매체의 발전을 통해
누구나 인간의 끝없는 소통의 욕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핸드폰 부재로 답답함도 느꼈지만
동시에 오랜 만에 편안함도 느꼈습니다.
 
불필요한 소통으로,
쓰레기 같은 말의 배설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는지요.
 
많이 이야기를 나눈다고 소통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기다림의 미학’, ‘느림의 미학’은 자취를 감추니
삶은 점점 얕고 가벼워질 수 뿐 이 없습니다.
 
통신매체의 사용에 분별의 지혜가 더욱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침묵도 결국은 소통을 잘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침묵을 통해 하느님과의 깊이 있는 소통도 가능하며
상대방의 말을 잘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웃 간의 소통에 그토록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으며
하느님과의 소통인 기도에는 얼마나 시간과 정력을 쏟는지요?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

하느님과의 소통이 원활할 때 참 기쁨, 참 행복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매일의 미사와 성무일도,
하느님은 물론 이웃과의 소통을 위해서임을 깨닫게 됩니다.
 
소통은 생명이요 힘입니다.
불통이면 영혼도 육신도, 너도 나도 죽습니다.
 
 
하여 매일의 전례기도는 우리의 숨통이요,
‘살기위해’ 소통의 전례기도는 필수입니다.

소통의 시각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죄란 소통의 차단입니다.
죄를 지어 소통이 차단된 형제가 있으면,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이르고,
그게 안 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데리고 가고,
이게 안 되면 교회에 알리라는 말씀,
단계를 밟아 소통의 회복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쉽게 풀이하면,
땅에서 불통이면 하늘에서도 불통이요,
땅에서 소통이면 하늘에서도 소통이란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라는 주님의 말씀 역시
땅에서 소통으로 하나 된 공동체의 청원기도는
그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도 소통되어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소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예전 아빠스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장상의 역할은 공동체 중심에 서서 교통정리를 잘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거리의 중심에 서있는 교통순경과 같은 장상입니다.”

여전히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공동체 소통의 중심에 교통순경처럼 자리 잡고 있는 지도자입니다.
나라의 대통령의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보수와 진보, 좌우, 노사, 영남과 호남, 부자와 가난한 자,... 등
힘들지만 나라의 중심에 서서
비전을 갖고
법과 상식, 순리에 따라 분별의 지혜로 잘 소통되도록
교통순경 역할을 해야 하는 대통령입니다.

보이는 교통순경의 공동체 지도자라면
보이지 않는 최고의 교통순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너와 나의 수평적 소통의 중심에,
나와 하느님과의 수직적 소통의 중심에 서있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이 그리스도를 닮아 갈 때 좋은 교통순경 같은 지도자요
서로간의 원활한 소통입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서에도 이런 소통의 관점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행되는 모든 역겨운 행위들로
하느님과의 소통이 차단되자 주님의 영광은 성전으로부터 떠납니다.
 
우상숭배와 불의의 온갖 역겨운 행위로
하느님과의 불통을 자초하여 징벌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과의 소통에 충실했던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에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께서는 당신은 물론 이웃 형제들과의 소통을 회복시켜 주심으로
우리 모두를 건강하고 자유롭게 하시며,
우리들의 이마에 십자표를 해 주심으로
온갖 불통의 죄악에서 지켜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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