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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13 조회수572 추천수3 반대(0) 신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 18,15-20)

-유 광수신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활하면서 많이 겪게 되는 경우이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나는 어떻게 하는가? 지금까지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 아닌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다. 우선 나의 행동이 복음적이었는가를 반성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보통 나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를 미워하고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억울해하기도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이고 마음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일러주는 말씀은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칙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요,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에페 5, 1-2)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선 형제가 죄를 지은 상태에서 "그대로 놔둔다."는 것은 그 형제가 상처를 입은 채로 그냥 놔둔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으면 일반적으로 "나는 그 형제에게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형제가 먼저 나에게 와서 용서를 청해야지, 내가 먼저 그 형제를 용서해주거나 타일러 줄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나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까 상대방이 와서 용서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켜야할 그리스도인이라면 형제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형제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든지 상처를 받고 있는 상태인데 "나 몰라라."하고 그냥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 모릅니다."(코전 13,5. 6-8)


적어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죄를 지음으로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를 다시 하느님께로 데려오기 위해서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앞 복음에서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 아흡 마리를 산에 둔 채 길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마태 18,12)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를 타일러 데려 오도록 하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행위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는"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을"(18,14) 원치 않으신다. 형제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오기 위해서 나는 가서 그를  타일러 데려와야 한다. 그것이 형제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어떤 형제가 아니면 이웃이 잘못했을 때 타이르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공동체가 더 나빠지지 않고 좋아지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보다 나은 공동체, 일치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잘못한 형제를 용서해주고 또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내가 용서받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일 죄를 지은 형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타일러 데려오지 않으면 그를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그를 소외시킴으로서 공동체는 분열되고 미움이 싹트고 형제적 사랑은 메말라갈 것이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는 것도 형제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다. 즉 가능하다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그에 대한 배려이고 존경의 표현이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나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그에게 가서 화해하거나 조용히 이야기해서 서로의 오해를 또는 미움을 풀도록 하지 않고 전혀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상대방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본인에게 가서 이야기하고 풀도록 하고 남들에게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친구들과 만났다하면 다른 사람을 흉보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해져있고 또 무척 재미있어한다. 참 고약한 취미를 갖고 있다. "타 이르다."라는 말은 상대방을 꾸짖으라는 말이 아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레위 19,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으로 말해야 하고 겸손하게 그리고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지 않고 좋은 말로 말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타이르러 갔다가 화해는커녕 더 악화되어 가지고 올 때가 있다. 대화하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말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 속에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 멸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말을 하러가기 전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예 타이르러 가지 않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마음이 진정이 되고 정말 용서해 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사랑의 언어와 행동으로 타이르도록 하자.

 

단 둘이 만나서 잘 안될 때 왜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려야 하는가? 우리가 혼자 가서 안 될 때 상대방을 잘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간다든지 아니면 중간에서 서로 오해를 풀게 해줄 사람과 함께 가게 되면 쉽게 용서해줄 수 있고 또 오해를 풀  때가 있다. 또 그렇게라도 안되면 교회의 사제나 수도자 아니면 교회 법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지 상대방의 죄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 하는가? 즉 최선을 다 하는가?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의무를 지고 있는 우리가 형제의 죄를 풀어주지 않으면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잃어버린 양은 결국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매고 푸는 열쇠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매고 풀어야 할 사람은 형제가 아니라 나의 몫이다. 아직도 내가 풀어야 할 사람이 있는가?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진리를 떠나 그릇된 길을 갈 때에 누가 그를 바른 길로 돌아 서게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 서게 한 그 사람은 그 죄인의 영혼을 죽음으로보터 구원할 것이고 또 많은 죄를 용서받게 해 줄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두십시오."(야고 5,19-20)오늘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해주고 화해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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