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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제3의 성사 ....... [김상조 신부님]
작성자김광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8-08-03 조회수535 추천수6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은 아주 유명한 기적사화다.
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아이들외에도
장정만 5천명 정도 되는 사람을 먹인 이야기다.
퍼 내도 퍼 내도 떨어지지 않는 도깨비 쌀 뒤주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방금 빵을 두 조각 냈는데
어, 빵이 그대로네? 이렇게 되었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많은 사람들은 너무 신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주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자들 손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방금 빵 조각 다 나눠주었는데,
어라 또 제자 손에 커다란 빵이 들려있네? 이런 걸까?
그렇지는 않았을거 같다.
그랬다면 사람들은 빵 먹는 일보다
예수님 손에서 일어나는 신기한 일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렸을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이루신 기적은 나눔의 기적외에 다름이 아니다.
빵을 떼어 주셨다는 것의 의미는 잘게 쪼갰다는 뜻일 것이다.
아무리 작은 것도 나누면 풍성해지고,
주고 또 주어도 여전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넘친 것은 이 나눔이 이루어낸 기적이다.
사람들 중에 누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생님, 우리 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늘 배고프지만
부자들은 이런 우리들에게 빵 부스러기 하나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맞고요. 하지만 여러분도 저 부자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물론 여러분이 배고픈 것은 가진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돌아갈 몫까지 차지했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여러분끼리도 서로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와 라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들어 보십시오.
부자는 늘 호의호식하며 날마다 화려한 생활을 했지만
자기 집 문간에 앉아있는 거지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 하나도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고 라자로는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서로 가진 것을 나누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이 부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한 형제, 자매입니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한 가족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모님을 어머니고 모시고
예수님을 형님으로 모신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니꺼 내꺼, 따지고 살면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는 뜻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맏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멀쩡한 남의 차를 내 차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신앙 가족이란 말은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지 소유물까지 한 가족인 것은 아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랬다면 5천명이 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진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변화된 사람들이 이루어낸 기적이다.
“여러분이 가난한 까닭은 여러분끼리도 서로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구니가 자기에게 돌아올 때마다 사람들은 조금만 떼어먹었고,
수중에 먹을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바구니에 넣어주었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다.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주면 줄수록 더 행복한 그런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자세히 들여다 볼 복음 대목이 있다.
오늘 복음 첫 마디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따로 외딴 곳으로 물러가셨다.”
예수님이 들었다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임금의 생일잔칫날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였다는 소식이다.
왕의 생일날 자기가 정부로 데리고 사는 여자의 딸이 춤을 잘 추어서
잔치 손님들을 즐겁게 해준 것이 기특해서 무슨 청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이 요망한 것이 자기 엄마 헤로디아의 부탁을 받고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허망하게 세례자 요한의 목은 한낱 생일날 노리갯감으로 전락한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다. 헤로데 왕이 이복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세례자 요한의 충언이 헤로디아 마음을 상하게 한 때문이다.
한낱 여인의 감정의 희생제물로 요한의 목이 잘린 것이다.
예로부터 의인은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늘 사회에서 거부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세례자 요한처럼,
또 예수님처럼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세례자 요한이 당한 죽음은
현세에서 하느님의 승리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몸을 숨기고자 하셨다.
사람들이 드문 광야로 몸을 물리셨다.
그럴만도 한 일이다.
위대한 의인이 어이없게 죽음을 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기가 막혀서
조용히 침묵중에 이 일을 곱씹어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지 하느님께 물어보지 않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민은 아랑곳없이 그분 앞에 병자들을 눕혀 놓았다. 고쳐달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이 괴로워서 조용한 곳에 가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허전해서 정말 좀 쉬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또 다시 어두운 현실을 예수님 앞에 들이밀었다.
“보십시오. 다 죽어가고 있는데 약 구할 돈도 없습니다.
요한이 죽었다고 하지만 우리도 죽게 생겼습니다.
억울하게 죽는 사람은 요한 말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헤로데 왕이 자기 생일날 사람 목숨을 선물로 내 주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생일날 그 잘난 선물 하나 주고 받지 못합니다.
요한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요한은 위대한 예언자라는 인정이라도 받아보았지만
우리 같은 가난뱅이는 왕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 환자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은 변경되어야 했다.
요한 같이 무고한 사람이 허무하게 죽는 현실은 요한 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기꺼이 당신 계획을 변경시킨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도 요한이 죽어서 슬픔이 북 받치는 상황이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그 마음을 위로받고 싶은 순간인데도 그것을 포기하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게 하신 까닭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많은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당신이 위로받고 싶었지만 당신보다 더 위로받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실제로 당신보다 더 위로받을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 군중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이들이나 나나, 이들이나 요한이나 다를 것이 무엇인가?
다들 병과 죽음 같은 어두운 현실 앞에서 무서워 떨고 있지 않은가?
요한이 죽었지만 또 다시 요한 같은 사람이 죽은 것을 이들은 너무도 많이 겪어오지 않았는가?
내가 지금 요한의 죽음을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한이 죽었지만 또 다른 요한이 나타났음을 이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힘없는 백성들이 희망을 갖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제2, 제3의 요한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을 백성들이 보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당신만의 귀한 시간을 기꺼이 사람들에게 돌려준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래서 제2, 제3의 요한, 그리고 제2, 제3의 예수가 이어질거란 사실을 예고하기 위해
저 위대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쪼개지고 또 쪼개져도 계속해서 불어나는 빵은,
결국 성체 성사로 이어지는 당신 몸의 기적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의인이 당하고 또 당해도 계속해서 의인이 이어질 것을 희망하면서
그 본보기로 십자가 위에 당신 몸을 바치셨다.
그리고 실제로 제2, 제3의 예수님의 성사가 순교자들을 통해,
그리고 다른 수많은 성인들을 통해 이어지게 하셨다.
기꺼이 당신 시간을 희생하고 백성들을 돌
보실 수 있었던 위대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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