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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 28일 야곱의 우물- 루카 18, 9-14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10-27 조회수459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나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기준 미달인 사람들을 판단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수녀원이란 곳은 철저한 규율 아래 침묵과 절제와 희생과 기도의 삶으로 영위되는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 기준에 맞춰야 했고, 나아가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성당에 앉아 있음으로써 하느님께 특별한 존재가 되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이 되기 전에 참된 수도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는 모든 율법 조건을 완벽하게 채우고 덤으로 더 지키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한 가지가 공든 탑을 무너뜨립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태어난 소중한 존재이므로 그 어떤 잣대로도 다른 사람을 업신여길 권리가 없습니다. 이를 아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어 창피를 주거나 돌에 맞아 죽도록 할 마음이 없어서 남몰래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도 의로운 사람입니다. 형들의 시기로 상인에게 팔리고, 이국땅에서 하인으로 살다가 억울하게 감옥살이까지 하며 아까운 젊은 날을 허비(?)했지만, 재상이 되고 형들을 재회했을 때 그 모든 일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용서하는 사랑을 보입니다. 진정 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사실 그의 자세는 하느님 앞에 선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스스로 도취된 상태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없이 자신이 하느님처럼 판단하고 결정해 버립니다. 참으로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기도라면 자신의 양심을 살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이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루카 15,29)라고 한 큰아들의 목소리를 반향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는 정말 종처럼 충실한 자입니다. 덤으로 주 2회나 단식하며 십일조도 꼭꼭 바치는 완벽주의자요 모범생입니다. 그는 찬양과 감사의 구조를 갖춘 기도를 구사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구색 맞추는 장식에 지나지 않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자, 하느님! 제가 이 정도 하였으니 당신도 이에 준하여 제게 갚아주셔야지요?’가 아닐까요?
 
좋은 말을 구사한다고 해서 좋은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2-­3)라고 했지요.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는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루카 15,21)라고 한 작은아들의 목소리와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라고 한 소경의 절박한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 참조) 그래서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21)고 하지요.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 공로에 대한 보상이 구원이라고 계산하며 사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다.”
 
이제 예수께서 이런 판단을 내리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세리는 자신이 의롭게 된 줄도 모르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한 바리사이를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은 위선자들`….”(마태 23,1-­36 참조)

 
오늘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시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복음서는 말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마태 6,6-­7 참조)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에서 “많은 말로써가 아니라 순결함과 통회의 눈물로써 우리 간청이 허락되는 것임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가 하느님의 은총에서 영감을 받은 열정으로 길어지는 경우가 아니면,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다 잘하는데 딱 한 가지 결함이 잘하는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기 때문에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실수도 많이 하고 재주가 없어도 좋은 인간적 품성 하나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묻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딱 한 가지의 차이입니다. 풍성하지만 중요한 것이 빠진 바리사이의 기도, 빈약하지만 온 마음이 담겨 있는 세리의 기도.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서도 하느님의 눈 밖에 날 수도 있고, 율법준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하느님께 의롭게 된 자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역설은
 
바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으뜸이 되고 싶으면 섬겨야 하고, 살고 싶으면 죽어야 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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