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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15 조회수2,033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5-18
그 무렵 이코니온에서는 5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8 리스트라에는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앉은뱅이로 태어나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9 그가 바오로의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그를 유심히 바라본 바오로가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고,
10 “두 발로 똑바로 일어서시오.”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2 그들은 바르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오로를 헤르메스라 불렀는데,
바오로가 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13 도시 앞에 있는 제우스 신전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문으로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제물을 바치려고 하였다.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소리를 지르며 15 말하였다.
여러분, 왜 이런 짓을 하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지난날에는 하느님께서 다른 모든 민족들이 제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곧 하늘에서 비와 열매 맺는 절기를 내려 주시고 여러분을 양식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18 그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군중이 자기들에게 제물을 바치지 못하도록 겨우 말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6

리가오니아는 타우루수 산맥 남쪽 기슭, 갑바도기아의 동쪽, 갈라디아 지방의 북쪽, 프리기아와 비시디아 지방의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이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리스트라와 데르배다.

 

8

이 태생 앉은뱅이에 대한 묘사는 3,1-10에서 베드로가 고쳐준 앉은뱅이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두 치유사건의 유상성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루카의 고의적인 의도에서 나왔다. 바오로 역시 베드로와 예수께서 하신 똑같은 행적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9

눈여겨보다라는 표현에 대해 루카 4.20; 22.56; 사도 1.10; 3.4.12; 6.15; 7.55; 10.4; 11.6; 13.9 참조. 구원과 믿음의 연결은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다.

 

10

3.8과 같은 표현.

 

11

아테네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이 시골 읍네 사람들은 바오로의 행적 앞에서 소박한 반응을 보인다. 바오로를 신으로 떠받드는 그들의 말은 당대 그리스 -로마 종교의 한 모습을 반영한다. , 사람들 가운데는 인간 세상과 신의 영역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12

제우스는 올림피아 만신전의 최고신이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인데,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신또는 언변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13

이 도시 사람들은 성문 밖 광장에 제우스 제단을 차려놓고 제사를 바쳐왔던

것으로 보인다. 제우스 신전의 제관은 제물로 바쳐질 황소들과 그 머리에

걸 화환을 준비해 가지고 성문 앞에 왔다.

 

14

사도행전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명시적으로 사도라고 칭한 유일한 예다. 14.4의 사도에 대한 언급은 포괄적이다. 한편 여기서는 바르나바가 바오로보다 먼저 나오는데, 리스트라 사람들이 바르나바를 바오로보다 높은 신으로 착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옷을 찢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극도의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격한 감정을 나타낸다. 옷을 찢은 두 사도는 큰 소리로 외치며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연속된 행위는 판관 14.16-17을 연상시킨다.

 

15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입니다란 말로 두 사도는 자신들이 하느님의 옝예로운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됨을 분명히 밝힌다. 이 말은 자기를 신처럼 영접하는 고르넬리오에게 한 베드로의 말을 연상시킨다. “부질없는 것들로부터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라는 표현은 헬라계 유다인들의 호교론을 특징짓는다. “돌아서다는 루카가 즐겨쓰는 동사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라는 표현은 4.24를 반영한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근거로 이용된다.

 

16

여기서 은 관습 또는 윤리적 행위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이방인들에게 아직 계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못 알아보는 것은 용서가 된다.

 

17

하느님이 자연에 하신 일은 그분의 선하심을 증언한다. 이 일은 유일신 숭배의 근거가 된다.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의 내용, 즉 비와 열매와 음식과 마음의 기쁨 등은 시편 144.13-17; 146,8-11을 상기시킨다.

 

18

기적에 대한 군중의 반응이 매우 컸음을 암시하는 표현.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1-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21

15절을 반복한다. 다만 사랑의 의미를 전개하기 위해 역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부활 이후 제자들의 공동는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안에서 성장해 가는 공동체임을 시사한다. 물론 이 공동체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서는 예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전제된다. “드러내 보인다란 말은 제자들의 노력에 앞선 예수의 자기계시를 가리킨다. 이 계시는 또한 하나의 지속적 과정이다. 예수는 자기의 계명들을 지키면서 자기를 더욱더 믿고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강하게 드러내 보인다. 예수를 사랑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에게 사랑안에서 예수 자신을 더욱더 열어보인다.

 

22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또는 타대오라고 불리는 사도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의 형제 유다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여기서 언급된 유다가 요한복음서의 예수의 형제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와 상충된다.

 

예수가 왜 세상과는 거리를 두려 하는지 묻는다. 예수의 자기계시를 오해한 것이다. 예수는 사랑의 내적 현시를 뜻했으나 유다는 세상에 대한 외적 현시를 물은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 왜 세상이 예수의 자기계시에서 제외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이의제기로서 의미는 있다. 이 질문 이면에는 왜 부활한 예수가 제제들에게만 발현했는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이의나 항변이 시사되어 있다.

 

23

유다의 질문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다. 앞서 말한 바를 거듭 강조할 뿐이다.

15.21ㄱ 참조. 21ㄴ절 참조

 

살 것입니다거처를 만들겠습니다를 의역한 것이다. “거쳐14.2와 관련된다. 따라서 머문다또는 거처한다보다 깊은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거처하신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숭배적 의미나 종말 약속을 기다리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느 영적 방식으로 공동체안에 현존하는 의미로 언급된다. 제자들은 예수가 있는 곳 하느님의 사랑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에게 간다란 표현도 8절과 관련된다. 제자들과 내적 결속관계를 맺고 있는 예수와 함께 아버지께서도 그들에게 가서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 안에 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공동체 안에 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공동체 삶은 천상세계에서 비로소 볼 영광을 기다리며 아버지께서 영예롭게 해주실 것을 희망하는 삶이다.

 

24

제자들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유다의 질문에 대한 간접적 대답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은 예수의 말들을 듣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를 사랑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므로 예수는 그런 세상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없고 드러내 보이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예수와 유다인들의 논쟁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항의를 시사한다. 믿지 않는 세상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예수 자신을 그런 세상에 드러내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은 불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제자들에게 말한 것이므로 예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의미도 있다.

 

25

성령의 활동과 관련지어 예수의 지상적 계시활동을 강조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계시하고 가르친 말을 일단락짓고,이제 이별의 시점에 이르게 되었음을 시사한 표현이다.

 

26

협조자가 바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한 성령임을 명시한다. 이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아버지께서 보내 주신다고 함으로써 성령의 파견이 아들의 파견에 연계됨을 시사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파견하셨듯이 이제 성령도 파견하신다는 뜻이다.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협조자의 파견을 원하고 그 파견을 아버지께 청했다는 뜻을 함축한다.

 

예수 대신 앞으로 가르쳐주고 예수의 모든 말을 상기시킨 협조자의 역할을 설명한다. “가르친다란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계시행위를 뜻한다. “협조자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계속 이행한다. “상기시킨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용어로서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협조자성령의 임무는 예수의 계시 내용을 증언하면서 더욱 심화하고 실현하는 일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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