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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7 부활 제5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16 조회수1,180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4,19-28
그 무렵 19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유다인들이 몰려와
군중을 설득하고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다.
20 그러나 제자들이 둘러싸자 그는 일어나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그는 바르나바와 함께 데르베로 떠나갔다.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은 다음,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28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9

바오로를 공격한 유다인들은 이미 복음이 성공적으로 전파된 안티오키아와 이고니온에서 온 소수의 무리였다. 이들의 광신적 적대 행위가 결코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이같은 광신적 반대자들의 활동은 바오로 자신의 펴지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바오로는 1고린 11,223-29에 나열한 수난의 긴 목록에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고 유다인들에게 돌로 맞은 적도 한 번 있었다고 고백한다.

 

20

그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모여든 제자들은 바오로의 여행 동료들이거나 바오로가 리스트라에게 개종시킨 사람들일 수 있다. 거의 죽을 뻔한 바오로가 즉시 일어나 도시로 들어갔다는 서술은 비실현적이지만 그러나 고대 설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일반적 묘사와 부합한다.

 

21

데르베에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만들었으니 이 도시에 대한 선교의 목적이 달성된 셈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이곳을 떠나 안티오키아로 돌아간다.

 

22

바오로가 리스트라와 이고니온에 들른 것은 당순한 여행경로만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한 사목적 방문이었다. 정신을 굳세게 한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체포되시기 전날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도 나온다(루카 22.32).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에 대해 루카 18,23-25; 23.42 참조.

 

23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지역교회마다 원로들을 임명했다는 보고는 디도 1.5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보고는 바오로의 친저 서간에 소개된 본격적 공동체 조직과는 거리가 있다. 루카는 단순히 자기 당대의 교회조직이 이미 바오로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이 구절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원로들을 예루살렘 지도부와 사도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에서 고별연설을 할 때 그 교회의 원로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인다. 단식과 기도의 특별한 기능에 대해 9.9; 13. 2-3 참조.

 

24

이탈리아는 베르가몬의 왕 아팔로스 2(기원전 159~138)가 창건한 항구였다.

 

27

13-14장 전체의 이야기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안티오키아 지역교회의 충실한 선교사로 묘사된다. 그들은 이 교회로부터 파견되었고 다시 이 교회에 돌아와 자신들의 선교활동을 보고한다. 하느님이 함께하셨다는 내용은 요셉에 대한 언급과 예수의 공생활 요약에도 등장한다. 루카는 구세사의 위업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임을 언제나 강조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믿음13-14장 전체의 주요 주제인 조건임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15.19.11의 내용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한다.

 

 

 

 

 

 

 

 

 

 

 

복음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7-31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30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31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27

평화의 인사는 보통 작별인사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떠나고자 한다. 공관복음에서도 평화를 주고 떠나고자 한다. 공관복음에서도 평화는 단순한 인사보다 깊은 뜻을 지닌다. “평화는 종말론적 구원 개념으로서 예수가 이 세사엥 옴으로써 사람들에게 선사되고 예수의 말로 각 사람에 전달되며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서도 이루어진다. 부활한 예수도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한다. 평화는 부활 이후에도 예수의 선물로 강조된다.

 

이 평화는 예수 안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알고 희망을 가짐을 뜻한다. 이런 평화의 기원 인사말을 바오로 서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세상은 예수가 주는 참된 평화를 알지도 가지지도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참된 평화를 선물로 받아 누리는 자들로서 세상에서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암시된다.

 

예수가 이별의 시점에서 제자들을 경고하고 격려하는 말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제까지 한 말을 되새겨 듣도록 하려는 의도도 시사한다.

 

28

예수가 이별의 시점에서 제자들을 경고하고 격려하는 말이다.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제까지 한 말을 되새겨 듣도록 하려는 의도도 시사한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떠나간다는 것에 대해 제자들이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지금까지 말한 바를 상기시킨다.

 

나를 사랑한다는 문맥상 예수의 말들을 받아들여 지킴을 뜻한다. 바로 이런 사랑에서 슬픔보다 오히려 기쁨이 솟아난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예수가 가는 의 완성을 뜻한다. 이것이 예수가 제자들을 데려가는 목적지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가 이제 그 길을 가는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 평화의 기쁨은 전통적으로 성령의 선물로 언급된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지위가 낮거나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구원의 주도권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뜻이다. ,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고 아들의 영광도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다. 여기서는 특히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관점에서 표현된다. 제자들의 기쁨은 아들의 영광에 참여함으로써 가득 채워진다.

 

29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가 이제까지 말한 내용을 가리키며 상기시킨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제까지 말한 동기는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언급된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인해 낙담하여 믿음을 잃을 경우도 있으니 그에 대처하란 경고다.

 

30

예수는 중요한 모든 말을 제자들엑 다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문맥상 예수가 게쎄마니 동산으로 가면서 제자들에게 짤막하게나마 말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편집 때 추가된 설명일 수도 있다.

 

12.31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세상의 두목이 더 우세한 것으로 표현된다. 저자는 예수르 체포하러오는 유다의 군대를 구체적으로 가리킨다.

 

내용상 19.11과 흡사하다. 예수 자신은 자발적으로 적수들에게 끌려가며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임을 시사한다.

 

31

세상은 예수의 행동이 아버지께 대한 사랑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이 행동은 세상의 두목이 자기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내버려 두고 자신의 죽음도 받아들임을 가리킨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나에게 명하신 그대로 내가 행동하고 있다란 말로써 더욱 강조된다. “세상이 아버지께 대한 예수의 사랑을 알아야 하다는 것은 예수가 세상 구원을 위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세상에 대한 화해적 구원의 전망을 시사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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