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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2 부활 제6주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21 조회수1,420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

<성령과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기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5,1-2.22-29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22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

여기서 유다는 그곳에서 온 수구파 유다인들이 이방인 선교의 합법성을 문제삼는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 수구파 유다인들은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제자들과 함께 꽤 오랫동안 머물렀던 안티오키아로 내려왔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하느님의 백성에 귀속시키는 전통적 예식이었다.

 

루카는 이 관습에 전혀 적대감을 표시하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도 할례를 받았다고 보고하고 바오로로 하여금 어머니가 유다인인 디모테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한다. 그러나 루카는 결코 할례를 의화나 구원의 문제와

 

연계시킨 적이 없다. 그에게 있어 이 예식은 이스라엘 배성의 관습 중 하나에 불과하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도 이 할례를 종교적 위탁의 상징으로 보는 해석이 1세기 유다이즘 안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이 수구파 유다인들의 할례 논쟁은 믿음을 구원의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하는 루카의 신학적 통찰과 정면으로 맞선다.

 

2

수구파 유다인들이 할례받지 않은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의 자격을 문제삼자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예루살렘 지도부에 파견하여 정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유권적 해석을 요청한다.

 

22

야고보의 결정은 예루살렘 모교회 전체에 받아들여졌고 자체 내에서 사절 둘을 뽑아 바오로, 바르나바와 더불어 안티오키아로 파견했다. 이들의 역할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경의를 표하고 예루살렘 지도부의 권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나중에 바르사빠이고, 다른 하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결별한 후 바오로의 새 동료가 된 실라였다. 실라는 바오로의 중요한 협력자였던 실바노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유다 바르사빠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없다. 혹시 1.23에 나오는 요셉 바르사빠의 형제가 아닌지 모르겠으나, 바르사빠라는 이름이 하도 흔해서 이를 확신할 수 없다. 실라는 바오로의 여행 동반자인데, 일반적으로 1.3데살 1.1에서 두 서간의 발신자로 드러나고, 2고린 1.19에서는 고린토에서 바오로와 디모테오와 함께 설교하던 실바노와 동일시된다. 1베드 5.13에서는 저저가 실바노를 이 서간의 필경사로 밝힌다. 실라는 히브리 이름 세일라의 그리스어 번역이고 실바노는 그것의 라틴어 번역이다.

 

23

직역: “그들의 손으로”. 디아 케이로스는 “...에 의해서로 번역되는 칠십인역의 표현으로 2.23: 5.12:7.25:11.30:14.3에도 나온다. 여기서는 이 편지가 이들 손에 의해 씌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뜻이다.

 

바오로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선교활동을 벌였다는 언급은 이제까지 없었다. 그러나 루카는 이 지방의 선교가 바오로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음을 당연한 사실로 여긴다. 사도들과 원로들이 써보낸 편지는 이 세 지역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온 교회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편지가 실제로 전달된 곳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여 이룬 혼합 공동체였지 순수하게 또는 대부분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들은 아니었다.

 

24

우리 가운데 몇몇은 예루살렘 지도부로부터 정식으로 파견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권위가 없었다. 루카의 이 묘사는 바오로의 서간과 내용이 일치한다(갈라 2.12).

 

25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더불어 유다와 실라를 지역교회들에 파견하기로 한 것은 예루살렘 지도부의 공식 결정이었기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수구파 유다인들과는 바르나바에게 붙여준 영예로운 칭호다.

 

2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붙여준 영예로운 칭호다.

 

28

독자는 이 규정들이 무엇인지 알지만 이 편지가 전달되는 지역교회들은 아직 그것을 모른다. 성령과 사람 활동이 함께 협력하는 또 다른 예에 대해 13,1-13 참조.

 

29

지키다는 칠십인역에서 계약이나 계명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통한다.

 

 

 

 

 

 

 

2독서

<천사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21,10-14.22-23
10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22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10

거룩한 도성 묘사의 서두는 에제 40,2에서 유래한다: “하느님이 나를 고국 이스라엘로 데려다가 높은 산에 내려놓으셨다. 그 위에 남쪽으로 성만한 건물이 있었다.”

 

11

찬란한 영광은 옛적 장막과 성전을 봉헌할 때처럼 초월적 존재의 현존을 나타낸다. 이어서 묘사되는 것들은 새 예루살렘의 완전함을 강조한다. 이 모든 소재는 재건된 예루살렘의 현시와 신현을 전하는 에제 40-48장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이러한 묘사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현실에 적용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본다.

 

거룩한 도성에서 나오는 빛이 4,3; 21,18.19에서처럼 벽옥에 비유된다. 구약성서에서 벽옥은 대사제의 가슴받이와 띠로 왕의 장식을 묘사할 때 거명된다. 성서에서 푸른색은 나뭇잎이나 풀들의 색이라는 점에서 활기찬 모습, 건강한 모습, 번영과 생명을 지칭한다.

 

12

천상 예루살렘은 세 요소, 곧 성벽과 성문과 주춧돌로 구성되어 있다. 이사 54,11-12의 영향일 것이다. “이제 나는 너의 돌들을 홍옥 위에 쌓아 올리고 청옥 위에 성의 주추를 놓으리라. 루비로 요새의 뾰죽탑을 만들고 수정으로 성문들을 만들며 성 둘레를 보석으로 쌓으리라.” 이처럼 저자는 이사 54장에서 구조를 위하되 동시에 에제 48장의 자료들로 재작업하여 자신의 표현을 한다.

 

열두 성문은 천상 예루살렘에 재건된 옛 이스라엘의 상징이다. “열두 천사는 만약 상징적 형상이 아니라면, 이사 62.2에서 예루살렘아, 내가 너의 성 위에 보초들을 세운다한 것처럼 천상 예루살렘을 지키는 수호자들이며, 그 성의 거룩함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교회는 계약의 백성의 완성이다,

 

14

영광받은 새 이스라엘의 기초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다.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여러분은 나그내가 아니라 성도들과 같은 시민이자 하느님 가족이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그리스도 예수를 모퉁잇돌로 하여 세워진 건물입니다(에제 2,19-20).

 

22

천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천상 성전에 대해 기록한 묵시록 예언 부분의 진술들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성서에 계시된 하느님의 현존 과정을 따라 영성화 과정을 밟아간다고 볼 수 있다. , 예루사렘 성전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영적 성전이며 살아 있는 돌로된 성전인 새로운 백성 사이의 신적 거주로 묘사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느님 당신이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바꾸어 묘사된다.

 

천상 예루살렘에는 거룩한 현존을 위한 자리가 따로 없다. ”백성들과 함께하는 하느님의 현존이 이제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4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종말시대의 새로운 성전이라고 말한다(요한 2.21 참조).

 

23

천상 예루살렘을 소개하는 많은 요소는 이사야가 메시아 시대의 예루살렘을 묘사한 데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9이사 60장 참조). 그러나 저자는 구약성서의 모든 메시아 예언이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상황 안에서만 완전히 성취된다고 본다.

 

 

 

 

 

 

 

복음

<성령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3-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23

유다의 질문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다. 앞서 말한 바(2-3.15.18.21절 참조)를 거듭 강조할 뿐이다.

 

15.21ㄱ절 참조.

21ㄴ절 참조

 

살 것입니다거처를 만들겠습니다를 의역한 것이다. “거처14.2와 관련된다. 따라서 머문다또는 거처한다보다 깊은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거처하신다”(머무신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숭배적 의미나 종말 약속을 기다리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영적 방식으로 공동체안에 현존하는 의미로 언급된다. 제자들ㅇ느 예수가 있는 곳 하느님의 사랑안에 있게 되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에게 간다란 표현도 8절과 관련된다. 제자들과 내적 결속관계를 맺고 있는 예수와 함께 아버지께서도 그들에게 가서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 안에 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공동체 삶은 천상세계에서 비로소 볼 영광을 기다리며 아버지께서 영예롭게 해주실 것을 희망하는 삶이다(12.26 참조).

 

24

제자들에게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유다의 질문에 대한 간접적 대답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은 예수의 말들을 듣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를 사랑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므로, 예수는 그런 세상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없고 드러내 보이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25

성령의 활동과 관련지어 예수의 지상적 계시활동을 강조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계시하고 가르친 말을 일단락짓고, 이제 이별의 시점에 이르게 되었음을 시사한 표현이다.

 

26

협조자가 바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한 성령임을 명시한다. 이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아버지께서 보내 주신다고 함으로써 성령의 파견이 아들의 파견에 연계됨을 시사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파견하셨듯이 이제 성령도 파견하신다는 뜻이다.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협조자의 파견을 원하고 그 판견을 아버지께 청했다는 뜻을 함축한다.

 

예수 대신 앞으로 가르쳐주고 예수의 모든 말을 상기시킬 협조자의 역할을 설명한다. “가르친다란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계시행위를 뜻한다. “협조자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 예수의 계시를 계속 이행한다. “상깃킨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용어로서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협조자성령의 임무는 예수의 계시 내용을 증언하면서 더욱 심화하고 실현하는 일이다.

 

27

평화의 인사는 보통 작별인사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고 떠나고자 한다. 공관복음에서도 평화는 종말론적 구원 개념으로서 예수가 이 세상에 옴으로써 사람들에게 선사되고 예수의 마로 각 사람에 전달되며 제자들의 복음 선포에서도 이루어진다. 부활한 예수도 제자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한다.

 

평화는 부활 이후에도 예수의 선물로 강조된다. 수난시기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적용도ㅚ는 선물이다. 이 평화는 예수 안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알고 희망을 가짐을 뜻한다. 이런 평화의 기원 인사말을 바오로 서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세상은 예수가 주는 참된 평화를 알지도 가지지도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제자들은 예루로부터 참된 평화를 선물로 받아 누리는 자들로서 세상에서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도 암시된다.

 

28

예수가 아버지께로 떠나간다는 것에 대해 제자들이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지금까지 말한 바를 상기시킨다.

 

나를 사랑한다는 문맥상 예수의 말들을 받아들여 지킴을 뜻한다. 바로 이런 사랑에서 슬픔보다 오히려 기쁨이 솟아난다.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예수가 가는 의 완성을 뜻한다. 이것이 예수가 제자들을 데려가는 목적지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가 이제 그 길을 가는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한다. 평화의 기쁨은 전통적으로 성령의 선물로 언급된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지위가 낮거나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구원의 주도권이 아버지에게서 나온다는 뜻이다. ,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고 아들의 영광도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다. 여기서는 특히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관점에서 표현된다. 제자들의 기쁨은 아들의 영광에 참여함으로써 가득 채워진다.

 

29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제까지 말한 동기는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언급된다.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인해 낙담하여 믿음을 잃을 경우도 있으니 그에 대처하라는 경고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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