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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의 눈으로/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22 조회수923 추천수1 반대(0) 신고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아닙니다. 나는 물질적인 것을

비난하는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고통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인간적인 쾌락에 반대하여 빨간불을

켜는 하느님을항상 시험에서 

100점을 요구하는 하느님을 

인간 축제의 자리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하느님을손길이닿는

모든 것을 따뜻하게 만드는 태양의

아량을 갖고 있지 못한 하느님을

나는 믿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런 하느님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스페인의 J. 아리아스 신부의 책

내가 믿지 않는 하느님에서 인용한 것이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심오하고 오래된 이단은,

창세기의 말씀을 뒤집어서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대로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라고 말했다.

이것은 하느님이 사랑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고 하느님이 곧 사랑이라는 뜻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이다.

세상에서 하신 모든 행위 창조의

첫순간부터 하신 모든 행위는 사랑이었다.

서글프고 이단적이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더욱 그분답게 하려는 대신에 하느님을

우리와 닮게 만들려고 고집해 왔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만은 빼놓고 쩨쩨하고

난폭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어 왔다.

우리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초상 대신에,

째째하고 화를 잘 내는 하느님의

캐리커처를 빈번히 그려왔다.

그 결과 우리 대부분은 하느님에게

흥미를 잃고 심리학을 구세주로 삼고

과학의 제대에서 미사를 올리는 인도주의

유형의 종교에 빠져들게 되었다.

하느님은 빛나기만 하는 태양과 같이

따스함과 빛을 발산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사랑만 할 뿐이다.

우리는 태양 아래에 서 있을 수 있고

그 빛 속에 서서 그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양을 떠나서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그 빛과

따스함을 가로막을 수 있다.

우리는 양산의 그늘 밑에 숨을 수가 있고,

어둡고 차가운 토굴 속에 자신을

가둬 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점이 가장 중요한데 태양은

우리를 찾아서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태양은 우리가 떠났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가슴을 열 수도 있고

그 사랑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있다.

우리는 중죄의 어둡고 차가운 토굴 속에

자신을 가둘 수도 있지만

(그리고 이 점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랑의 태양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죄악으로부터 나오는 변화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점점 더 추워지고

우리의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진다.

성서가 하느님의 '분노'에 대하여 언급할 때,

그것은 우리 안의 이런 슬픔을 가리킨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약속된' 사랑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일반적인 경험과 문학에서는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가장 지속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비록 어머니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잊어버린다 해도 나는

너희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다.

우리는 이런 진리에 대하여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의 핏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하고

뼛속 깊이 스며들게 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진리와 함께 붙어 앉아

흠뻑 젖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는 주님께 성령을 우리의 가슴 속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압바! 압바, 아버지!"

이 지식은 하느님이 내려 주신

매우 특별한 은총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 속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성 바오로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이미지

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로서

길 잃은 양들을 사랑으로 찾아 나섰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의사로서 우리가

병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동시대인들에게서 예수님은 율법에 따라

사건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 교사였으며,

사랑의 절대성을 자각한 교사였다.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화나게 했다.

죄인들과 어린이들을 빼놓고

모든 사람을 화나게 했다.

죄인들과 어린이들은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했다.

이것은 모두 유명한 '잃었던 아들'

비유에 잘 나타나 있는데,

"하느님은 죄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비유 끝부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되풀이해서,

"너는 집에 왔다 너는 집에 온 것이다!"

하고 말한다. 잃었던 아들은 마침내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존 파웰 지음 / 정성호 옮김)

- 성바오로 펴냄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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